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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선 달린 북한­일 수교 협상/기약없이 끝난 북경 제3차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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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핵사찰·배상 묶어 토의 고수/일본/「은혜」문제 거론에 거센 반발/북한
북경에서 열린 북한­일본간의 수교협상 3라운드는 회담일정을 하루 연장해가면서까지 의견접근을 꾀했으나 결국 다음회담 날짜마저 합의하지 못한채 「사실상의 결렬상태」로 끝났다.
22일 밤 한 북경소식통은 회담이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말해 제4차 본회담이 열리기까지는 상당한 냉각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측 전인철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이날 회담결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일본정부의 견해대로라면 북한이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을 자격이 없다는게 된다. 자격이 없다면 왜 국교정상화교섭을 시작했는가』라며 회담자체에 회의적이라는 북한측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이어 『일본이 국교정상화에 뜻이 없다면 끝내도 좋다』며 일본측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웠다.
북한측의 심기를 이처럼 불편하게 한 것은 북한이 교착상태에 빠진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내놓은 관할권(북한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에 관한 새 제안을 일본측이 받아들이지 않은채 「핵사찰」문제를 계속 물고늘어진데다 「이은혜」문제까지 회담석상에서 거론한 때문으로 보인다.
나카히라(중평립) 일본대표는 이날 북한측이 20일 제안한 「선수교」주장을 비현실적이라고 거부하면서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핵사찰」「배상」문제도 병행해 토의하자는 일본측 주장을 밀어붙였다.
이에 대해 전대표는 『일본의 견해에는 불만이다. 이런 상태로는 우리측 견해를 얘기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일본측의 고압적 자세에 반발했다.
그러나 나카히라 일본대표는 계속해 「이은혜 문제」를 거론하면서 『경찰수사에 따르면 KAL기 폭파사건 범인인 김현희 전 북한공작원의 일본어교사 「이은혜」라는 여성이 일본인이므로 그녀에 대한 조사를 해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북한측이 선수교를 요구하고 「관할권」에 대한 새 제안을 하면서까지 국면전환을 노린 것은 「이은혜」문제를 일본측이 회담석상에서 끄집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은 일본이 이은혜문제를 집요하게 거론하는데 대해 반발 또한 상당히 거셌던 것으로 한 회담참석자는 전했다.
전대표는 『이 문제가 조일교섭상 어떤 의제에 속하는가. 이는 회담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철회를 요구하고 싶다』고 말해 「이은혜」문제 거론에 크게 반발했다.
북한측이 이처럼 「이은혜」문제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자칫 잘못 대응했다가는 KAL기사건이 북한의 테러행위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게돼 「현체제의 존속기반을 흔들수도 있다」(북한전문가)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측도 국민여론을 의식하는 한편 교섭전술상으로도 이 문제를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한 소식통은 풀이했다.
이번 회담을 통해 북한측은 어떻게 해서든지 수교를 서두르자는 북한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두개의 카드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나는 배상·핵사찰 등은 일단 수교가 이루어진후 협의하자는 「선외교 수립」카드였고 또하나는 『북한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는 북에 한한다』는 「관할권」카드였다.
「선외교수립」주장에 대해 일본측은 핵사찰문제등 어려운 현안을 기피하려는 북한측의 「작전」임을 간파,의제의 동시병행토론을 계속 주장했다. 결국 북한측도 이에 동의함으로써 교섭을 결렬시킬 수 없다는 약한 입장을 드러냈다.
한편 「관할권」문제에 대한 북한측의 제안내용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주권이 미치는 범위는 한반도의 반분」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데다 「한국」의 존재를 인정하는 구체적 단어가 없어 「조선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주장해온 북한측의 기본원칙에 변경은 없는 것으로 판단,일본측은 교섭의 진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교섭일정을 하루 연장하면서까지 대응한데 대해 나카히라 대표는 북한의 새 제안이 『종래보다 진전된 것』으로 평가한 때문이라고 밝혔다.
회담결렬 일보직전까지 나간 상황에서 이날밤 나카히라 대표가 『교섭계속에 이의는 없느냐』고 묻자 전대표가 『이의는 없다. 그러나 일정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받은 것은 『내심 불쾌하면서도 회담은 중단시키고 싶지 않다』는 북한측의 복잡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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