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번엔 동남아 '차관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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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필리핀의 최대 채권자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중국이 경제력을 앞세워 동남아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13일부터 이틀 동안 필리핀 세부에서 열린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 및 동아시아 정상회담에 참석한 뒤 15일부터 필리핀을 공식 방문한다. 원 총리는 방문 기간 중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과 5억 달러 규모의 경제개발 차관 제공 합의서에 서명할 예정이다.

이는 지난해 중국이 앞으로 3년 동안 중국수출입은행을 통해 필리핀에 제공키로 약속한 60억 달러짜리 차관의 일부다. 중국은 이미 필리핀 철도 현대화를 위해 9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들 차관과 별도로 원 총리를 수행하고 있는 중국의 국영회사 경영인들은 이번 방문 기간 중 필리핀 농산물 회사에 50억 달러 규모의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필리핀의 로물로 네리 경제기획청 장관은 "이번 지원으로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필리핀에 가장 많은 차관을 제공한 나라가 됐다"며 "이번 차관은 중국의 대외 지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말했다. 일본은 필리핀에 10억 달러 규모의 개발차관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국회 비준이 나지 않아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네리 장관은 "중국은 차관 제공 발표에서 지원까지 수개월밖에 걸리지 않지만, 일본은 몇 년이 걸려 정부로서는 금리가 다소 높아도 중국 차관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일본 차관은 40년 만기에 연리 1~2%에 불과하지만 중국 차관은 20년 만기에 금리는 3%로 다소 비싸다.

필리핀의 아로요 행정부는 자국 경제개발을 위해 철도 현대화에 30억 달러, 각종 댐 건설에 10억 달러, 고속도로 건설에 6억3300만 달러 등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지난해 발표하고 해외 차관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마닐라대의 베니토 림(정치학과) 교수는 "중국은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관들의 손이 뻗치지 못하는 틈새를 적극 개발, 각국에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자국의 소프트파워 확대를 노리고 있다"며 "앞으로 이 같은 추세는 특히 동남아에서 급속히 확산해 중국의 역내 영향력이 급증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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