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싸움에 익숙한 다변가 대통령 노무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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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대통령 노무현 [중앙포토]


“송년 모임에 참석했더니, 노 대통령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 밥값을 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입조심을 하고 있는데, 10분도 안 돼 한 사람이 ‘못 참겠다. 돈을 내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며 대통령 이야기를 꺼냅디다. ”

국회와 정부 고위직을 지낸 정계 원로가 전해준 말이다. 새해를 맞아 독자에게 누구를 소개할까 고민하던 나에게 주변에서 들려온 것은 온통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뿐이었다. 정치부에 있으면서 직·간접으로 대통령을 취재했지만 노 대통령과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딱 한 번, 2001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에서 물러나 새천년민주당의 고문으로 있었다. 아침 간부회의가 시작되기 전 기자들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이인제 의원 곁으로 몰려 들었고, 노 고문은 건너편 창가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새만금 사업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날은 정부가 새만금 사업의 재추진을 발표하기로 예고한 날이었고, 그래서 장관 시절 사업 추진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노 고문의 입장이 궁금했던 것이다.

노 고문은 “나는 새만금 사업 추진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충분히 검토하자고 말했을 뿐입니다”고 답했다. 나에겐 의외였다. ‘당당한 노무현’의 이미지와는 달리 변명처럼 들렸다. 장관 시절의 발언록을 찾았다.

“사업 타당성을 1~2년간 더 검토한 뒤 시행 여부를 결정짓자”는 게 정확한 ‘워딩’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1, 2년 더 끌자는 주장을 반대 입장으로 판단한 언론도, 반대한 적이 없다는 노 대통령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연말 노 대통령의 ‘격정 발언’ 이후 벌어진 노 대통령과 고건 전 총리의 대립각을 보면서 5년여 전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내가 본 노 대통령은 말을 잘하고, 많이 하고, 투박한 말투 탓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결벽적일 정도로 준비하고, 또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04년 가을 나는 노 대통령과 미국 행정부 고위인사 간 비공개 면담 내용을 취재해 보도했다가 ‘대통령 노무현’ 명의로 언론중재위에 제소됐다. 처음 있는 일이라 두렵고 떨렸다. 반론을 싣는 것으로 쉽게 합의가 됐지만 나는 지금도 언론중재위까지 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2005년 11월 청와대 홈페이지를 살펴보던 중 노 대통령과 조기숙 홍보수석이 주고 받은 댓글을 발견했다. 그때 나는 마치 고(故) 김현 선생이 신예작가의 독특한 문체를 의아스럽게 여기다가 “그의 비밀은 컴퓨터에 있었다”고 소리쳤던 것처럼, 노 대통령에 대해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무릎을 쳤다.

한 사무실에 있어도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 받고, 기존 형식의 파괴는 괘념치 않으며, 감성적 대면 접촉보다 조목조목 논리싸움에 익숙한 인터넷 세대의 모습을 대통령에게서 본 것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노 대통령에게 인터넷만큼 대응이 즉각적이며, 확산이 빠른 도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노 대통령은 그래서 ‘소통 장애’의 책임을 기성 언론에 돌리는 듯하다. 그러나 불통의 원인이 과연 언론에만 있는 걸까.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여권 인사의 말이다. “공기업 사장 인사 때 대부분 한 명의 후보를 노 대통령께 올렸다. 대통령은 인사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밑에서 책임지고 좋은 사람 뽑아보라는 취지였다. 그런데 한번, 해당 부처 장관의 간곡한 청으로 한 명을 추가해 두 명을 올린 적이 있다.

인사안을 본 노 대통령은 장관이 추천한 사람을 가리키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올라오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그 후 대통령이 싫어할 것 같은 사람은 절대 추천하지 않았다. ”

소통의 왜곡은 권력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건방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올해엔 국민이 대통령을 너무 ‘구박’(대통령이 자주 쓰는 단어 중 하나다) 하지 말았으면 싶다. 2008년 2월 24일까지는 누가 뭐래도 우리들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김정욱 중앙일보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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