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기념관 짓다 집도 날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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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아이구, 나는 경제를 몰라. 내가 그걸 알았으면 이걸 했겠수? 김을동이가 무식해서 시작한 거야.” 탤런트이자 ‘장군의 손녀’로 유명한 김을동씨가 중국에 독립운동가들의 기념관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았다. 1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국고보조금을 받기도 했지만 사재(私財)를 털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사재’에는 김을동씨의 압구정동 아파트도 포함돼 있고, 드라마 ‘주몽’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의 아들 송일국씨의 출연료도 포함돼 있다. ‘주몽’ 모자의 독립운동가 돌보기를 이코노미스트가 들여다봤다.


얘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할아버지였던 김좌진 장군이 독립운동을 했던 본거지인 중국 흑룡강성 해남시의 부시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조선족으로는 시에서 최고위직이었던 그가 김을동씨를 만나 “김 선생님, 여기가 장군님 활동의 본거지인데 장군님 동상이라도 하나 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하고 얘기했다. 김씨는 “그때 움찔했다”고 했다.

“명색이 내가 그래도 장군의 손녀라고 떠들고 다녔고, 할아버지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부끄러웠겠어요? 그 자리에서 당장 ‘그렇게 합시다’고 했죠.”

김좌진 장군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무장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예우는 그 명성만 못했다. 그는 안중근·윤봉길 의사 등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였고, 단 3개의 흉상밖에 전시되지 않은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그러나 그 흔한 기념사업회 하나 없었다. 김을동씨가 이 일에 발벗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처음엔 중국 정부 측에서 난색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하다가 암살당하셨고, 아버지는 또 주먹 세계와 국회의원을 하시면서 가족을 돌보지 않으셨어요. 가족도 안 돌보는데 조상 돌보겠어요? 만날 국가와 민족 얘기만 하셨죠. 그러니 할아버지의 독립 운동활동을 제대로 정리 못했죠.”

김을동씨는 아버지에 대해 묘한 애증이 있었다. 괄괄한 목소리며 큰 동작, 거침없는 입담 등이 과연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와 시대의 주먹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였지만 무골(武骨)이라고 할 만했다.

“아버지는 집안에 신경도 안 썼어. 우리한테 정도 안 줬어요. 지금은 이해가 돼요. 아버지도 여덟 살에 고아가 된 거 아녜요. 자신도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아봤으니 어떻게 사랑을 주는지도 몰랐겠죠. 자식들 교육이라도 시켜야 되는데 그것도 안 했어요. 본인도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잖아요? 그래도 ‘오야붕’으로 폼 잡고, 국회의원도 하고, 대학교수들도 자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니까 교육의 필요성을 못 느낀 거예요. 자식들에게 학비를 안 줬다니까. 그렇게 사신 분이에요. 바람처럼, 구름처럼….”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독립유공자 집안에 나오는 돈도 고아원에 갖다줬다. “장례식에 관이 나가는데 길 앞에 애들이 쫙 서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아버지가 독립유공자에게 나오는 돈도 고아원에 다 기부해 버린 거예요. 그러니 고아원 원장이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애들을 다 데리고 온 거더라고….”

▶2001년 청산리 구국 대장정에 참가한 김을동· 송일국 모자.

피는 못 속인다. 김을동씨 역시 아버지를 닮아 집안 단속은 둘째였다. “제가요 중국에 ‘김좌진 장군 기념관’을 짓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네가 무식해서 그렇지, 아니면 시작도 안 했을 거다’고 하는 거예요. 맞는 말이죠. 하하하.” 크게 가진 것도 없지만 그나마 있던 집 한 채도 할아버지 기념사업회 때문에 날렸다. 그의 표현으론 “거의 거지 될 뻔했다”고 한다. 돈도 돈이지만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에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나 ‘항일무장투쟁 역사관’이라는 명칭으로 기념관을 지으려하니 중국에서 난색을 표시했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 땅에다 외국 사람을 기념하는 건물을 건립한다는 것이 용납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한중우의공원’으로 고치고 만주에서 활동한 중국 독립운동가들까지 포괄하는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가 중국에 기념관을 짓고 조선족 어린이들에게 정성을 쏟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얘들이 다 우리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애들이고, 이들이 다 할아버지 밑에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자손인데…그래서 ‘할아버지의 활동무대에 기념관을 짓고, 중국과 한국을 잇는 교량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중국 조선족들이 다 우리 민족인데 이들을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머지않아 중국 시대가 오고, 중국으로 조기 유학을 가는 마당에 중국에 있는 우리 민족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이 고조선의 유민을 규합해 고구려를 세우듯 그도 조선족을 잘 길러 대한민국의 미래에 주춧돌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그가 벌이는 ‘청산리 구국 대장정’도 벌써 6년째 이어가고 있다. 중국에서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발생한 2003년 한 차례를 제외하곤 2001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청산리 구국 대장정은 청산리 독립전쟁 지역을 비롯해 대한독립군의 항일 전적지와 고구려 및 발해 유적지들을 우리 젊은 대학생들이 직접 찾아가는 역사 탐방이다. 김씨도 함께 걸었다. 매년 80명에서 120명의 대학생과 일반인이 참가한다.

주몽역의 송일국씨도 2001년 이 대장정에 참여했다. 대장정에 참여했던 송일국씨는 “중국을 떠돌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송일국씨도 물심 양면으로 기념관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아들 출연료까지 털어 넣어”

기념관 사업을 하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땅도 처음 얘기했던 곳에서 바뀌었고, 공사도 자주 중단됐다. 물론 국고보조금이 나왔지만(전체 예산의 3분의 2) 나머지는 개인 돈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정부 예산이 30억원 가까이 들었고, 김을동씨의 개인 돈이 10억원 가까이 들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65평에 살던 김씨는 2005년 5월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00만원인 아파트로 이사 올 정도였다.

월세방으로 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그의 아들이다. 2004년 대하드라마 ‘해신’에 출연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송일국씨는 이제 주몽을 통해 인기스타로 급부상했다. “일국이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월세죠. 걔가 집도 사주고, ‘한중 우의공원’에 돈도 보태주면서 지금 버티고 있어요.”

사재는 물론 아들의 출연료까지 털어넣은 한중우의공원은 이제 거의 완성됐다.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은 이미 완공돼 전시를 하고 있고, 소강당·연회실·커피숍·미용실·스낵코너도 완공해 운영하고 있다. 김씨는 이 부대시설을 이용해 자체 수익사업으로 기념관 운영비를 충당할 계획이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 청소년들이 중국어 연수를 왔을 때 사용할 연수원이다. 올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김씨는 “한국의 뜻있는 기업가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기업들이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반중 감정을 조장할 수 있다며 꺼리고 있는데 이는 사실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한중우의공원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한국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를 돕고, 중국과 친선을 강화하자는 취지예요. 후원하는 기업의 이름으로 기념관을 지을 예정이지요.”

이 계획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자체 자금으로 사업을 할 예정이다. 이미 10억원을 쓴 그에게 또 돈이 있을까?

“걱정마슈. 정 안 되면 또 주몽이 돈을 대야지 뭐. 일국이가 잘 된 것도 다 우리 조상들이 도와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된 것도 어찌 보면 다 독립운동가들 덕이다.

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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