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군살 빼고 살아남기 몸부림|구 동독 광학기술산실 카를 차이스예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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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통일독일에서 구 동독 주민들이 현재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체제변화에 따른 산업구조 조정과정이 가져다주는 고통의 하나다.
구 동독 사회주의 통제경제체제에서 통일독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근본적이고 규모도 방대한 산업구조 재편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경제혼란 현상 때문이다.
8천여개에 달하는 구 동독기업 가운데 어떤 형대로든 정상화가 가능한 기업은 겨우30%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전체 기업 중 30%에 속하는 생존 가능한 기업들 역시 안고있는 문제점은 적지 다.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백60㎞쯤 떨어진 인구 11명의 예나시는 이곳 구동독 광학기술의 산실인 카를 차이스예나사의 도시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낡고 우중충한데 비해 이 회사 본관건물은 크고 화려했다.
이 도시 인구의 60% 정도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이 회사의 본관건물은 시내 한복판 카를 차이스가 1번지일대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지난해 9월 예놉틱 카를차이스 예나GmbH로 이름을 바꾼 카를 차이스예나사는 구동독 기업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우량기업이었다.
구 동독기업의 매각을 전담하는 독일 신탁 관리청으로부터 「정부가 도와주면 소생할 수 있는 기업」으로 분류될 정도로 「우량기업」이었던 이 회사도 통일 후 사정이 어려워졌다.
『89년6월 7만명이던 종업원수가 현재 2만5천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도 금년 말까지 다시 1만명으로 줄게 됩니다.』

<인사부서 1개로>
이 회사 홍보담당 중역인 클라우스 샹골리스박사(58·드레스덴공대 교수)는 경영합리화방안으로 우선 대규모 인원감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25개의 공장을 12개의 사업분야로 축소했으며 25개 공장마다 분리 독립해있던 인사부의 경우 전체를 한 개로 묶어 통합하는 등 기구를 대폭 축소 조정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에서 생산하던 1천 종의 제품도 전략품목을 골라 2백 종으로 줄였다.
이 회사는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는 반도체분야와 2차대전 전부터 명성을 누려온 카메라 생산라인도 폐쇄했다.
회사 자체가 없어지거나 대표적 우량기업이었던 종업원6만명의 대규모 전자회사 로봇 회사처럼 회사가 뿔뿔이 나뉘어져 매각되는 아픔을 맛보지 않는 대신 카를 차이스예나사는 이처럼 살아남기에 갖가지 처방을 강구,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이 회사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매출액의 감소다. 물론 실제교환 비율이 다르긴 했지만 현재의 마르크화와 공식적으로는 1대1이었던 구동독 마르크(오스트마르크)화 기준으로 89년 이 회사의 매출액은 50억 마르크였다. 그러나 금년도 매출목표는 10분의1로 줄어든 5억 마르크로 하향 조정됐고 이나마 달성할지도 불확실하다는 것이 샹골리스 박사의 설명이다.
이 같은 경영상의 어려움보다도 이 회사가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진짜 고민은 다른데 있다.
회사이름에서도 잘 나타나듯 카를 차이스라는 같은 상표를 사용하고 있는 구 서독의 카를 차이스 오버코헨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다.
『동-서양쪽 카를 차이스사 대표들은 이미 양사를 합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봤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기본시각에 너무 큰 차이가 있어 합병작업은 아직 답보상태 입니다』
샹골리스 박사는 카를 차이스사의 실림에서 국토와 회사의 분단, 그리고 통일후의회사통합추진작업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했다.
예나의 기계공이었던 카를 차이스는 1846년 자신의 이름을 따 현재 카를 차이스예나사 본관 건물이 위치한자리에 이 회사를 창립했다.

<분단과 함께 분리>
그가 죽은 다음해인 1889년 그의 동료이며 후계자인 에른스트 압베는 카를 차이스 재단을 설립, 카를 차이스사와 자회사인 오토 쇼트유리제조회사의 전 재산을 이 재단이 소유, 관리토록 했다. 이 재단을 통해 카를 차이스사는 19세기말부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하루 9시간근무·최저임금제·유급휴가 등의 사원복지제도를 실시했다.
이 회사는 독일의 분단과 함께 둘로 나뉘어졌다.
포츠담조약에 따라 예나 시가 속해 있는 튀링겐주가 소련군관할지역이 된다는 사실을 안 미군은 소련군이 진주하기 며칠전인 45년6월 1백여명의 핵심기술자와 생산시설의 대부분을 구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로 옮겼다. 차이스 상표권까지 함께 가져간 오버코헨시에 카를 차이스 오버코헨사를, 마인츠에 쇼트유리체조회사를 각각 세웠고 전년엔 하이덴하임에 카를 차이스 재단까지 세워 명실공히 카를 차이스사의 대를 잇는 회사로 자임해왔다. 오버코헨의카를 차이스는 1년 뒤인 46년에 생산을 재개했고 지금은 종업원 3만2천명에 자산규모 30억마르크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동독에서는 48년 공산당정부가 차이스 재단을 국유화, 이후 국민기업 카를 차이스예나 콤비나트로 이름을 바꿨다. 예나의 카를 차이스는 89년까지 종업원 7만명, 연간매출액 50억 오스트마르크의 역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국토가 통일되면서「카를 차이스」라는 상표를 사용하는2개회사가 독일에 존재하는 서로에게 불편한 상황이 전개됐다.
이 때문에 통일이전부터 양사의 합병얘기는 심심찮게 나왔고 지난해 5월 양사 대표는「과도기가 끝나면 2개의 재단을 통합하자는 데 합의했다. 또 11월에는 카를 차이스 4개사, 즉 동독의 예놉틱카를 차이스 예나사, 예나유리사와 서독의 카를 차이스오버코헨사, 쇼트유리사 대표가 만나 카를 차이스도 통일하기로 합의했다.

<한국과 경협 추진>
통일독일 정부는 서독주도로 양사 통합을 할 경우 동독의 피해가 너무 큰 만큼 지원하는데 까지 지원, 동독회사를 살려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카를 차이스 예나사의 분석기기 담당 중역 클라우스 비너르트박사는 회사본관의 실험실 및 전시실로 안내하면서 이 회사가 자생할 수 있는 근거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기술은 서쪽은 물론 일본·스위스 등 광학기술선진국과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특히 의료기기·토목계측기·분석기기 등은 오히려 이들보다 뛰어납니다. 당장의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지만 인구 11만명인 예나시 부동산의 절반이 우리회사 소유지요』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과 전자기술은 앞서지만 광학기술이 취약한 한국이 자신들에겐 최고의 합작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달 중에 한국에 지점이 설립되고 6월에는 대규모 한국 경협 사절단이 이 회사를 방문하는 등 쌍방간의분위기도 무르익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협력분위기 덕분에 한국기자라는 안내자들의 설명에 만나는 사람마다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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