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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7)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32)|이용상|추석날밤 한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해방이 되던 1945년의 추석은 9월20일로 기억된다. 일본군 무장해체가 추석 5일전인 9월15일이었고 무장해제를 했던 바로 그날 김통역이 중국군에 왔으니까 그와 같이 생활한지 5일째 되는 날이 추석이었다.
내가 지금 그를 김영주라고 하지 않고 김통역, 또는 김일선(일본군에 있을 때 그의 명찰에 씌어있는 대로) 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아직 김영주라는 그의 본명도 몰랐으며 그가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을 때였으므로 혼돈 없으시기 바라는 뜻에서다. 즉 김통역이나 김일선이나 김영주는 이명동인인 것이다. 그가 자기 본명이 김영주라고 밝히는 날이 이제 곧 있을 터이니 그때까지는 그를 김 통역이나 김일선 이라고 하겠다.
추석날 밤 나는 김통역과 둘이서 술과 안주를 사들고 강가에 나갔다. 그때 내 주머니에는 나 혼자라면 1년쯤은 잘먹고 지낼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유격대에서 중경으로 떠날 때 여러 사람들이 준 송별금이었다. 김통역에게 일본군복을 벗어 던지게 하고 나는 그에게 국민복 스타일 면옷을 사 입혔다.
그러자 그는 허우대가 좋은 호남이 되었다. 밝은 달 강 언덕에는 어디선가 애상에 젖은 호궁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한층 더 향수를 느끼면서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지금은 기억에도 없지만, 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 것만은 확실하다.
『김동지, 사람의 운명이란 참 묘한 거지요. 내가 작년9월 평양사단에 입대 했을 때 나보다 8개월 먼저 입대한 학병들을 만났어요. 그들은 일시에 평양부대를 폭파하고 함경도 밀림지대를 뚫고 최종적으로 우리 독립군이 있다는 보천보·장백 방면으로 탈출한다면서 나에게 가담하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물론 기꺼이 참가하겠다고 했지요. 그때 궐기예정 날짜가 10월1일이라는 거예요. 추석날이지요. 오늘이 추석이라 그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 학병들을 따라나섰더라면 나는 지금 이렇게 김동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인데….』 『이 동지는 왜 거기 참가하지 않았습니까』『참가 안한 것이 아니라 참가 못했지요. 궐기하기 5일전에 나는 북지로 이동됐으니까요. 보천보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이동지는 보천보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으십니까』 『인연이라기보다 보천보는 우리 독립군이 국내로 진격해서 일본경비대를 부수고 독립의 깃발을 올렸다지 않습니까』『이동지는 그것을 누구에게 들었습니까』『국내에서 공공연히 말은 못하지만 그래도 쉬쉬하며 다들 이야기하지요. 만주 우리 독립군이 머지않아 평양이나 서울로 쳐들어온다고도 하고 독립군 대장은 축지법을 쓰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김일 장군이라고도 했는데 그 독립군들은 지금 어디에서 뭣들 하고 있을까요』
『그분들이야 조국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할리 있겠습니까. 정말우리 독립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지요. 그 광활한 남만주의간도와 동변도 (압록강 남만주연안 일대) 에서도 그랬지만 보천보 국내 진격 때에는 참으로 신났지요. 보천보를 습격한 것이 6월4일 밤10시였는데 이틀 전에 만주땅 10도구에서 출발, 23도구 상삼포 밀림에 가서 야영했고, 다음날 밤12시 뗏목으로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산위리 일본주재소 뒷산을 타고 보천보 가까이 갔다가, 4일 낮에는 밀림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어요. 그리고 야밤 10시를 기해서 김일성 장군이 쏜 신호탄 한발로 일제히 행동했으니까요. 『아니 김동지! 잠깐만…』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계속하는 그의 말을 잠시 말렸다. 그는 말에 열을 올리면 언제나 입에 거품을 무는 습관이 있었다.
『그토록 날짜와 시간과 지명까지를 모두 기억하시는데 김동지는 독립군 습격경로를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그는 말을 멈추더니 아주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이동지, 그 보천보 습격에는 나도 한몫 끼였거든요』
『아니 김동지가 보천보 습격에 참가 하셨다구요?』
너무 뜻밖의 일이라 나는 멍청하게 응시하다가『김동지는 그때 몇 살 이었습니까』하고 물었다.
『17세였습니다』
『17세때부터 독립전쟁에 가담하신 분이 어떻게 일본군 통역을 하셨지요?』
그렇게 물은 순간 나는「아차」싶었다. 말하자면 그런 독립투사가 왜 친일파노릇 (일본군통역)을 했느냐는 질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친일파란 표현이 얼마나 모욕적인 말이었던가?
창백해지는 김통역 이었다. 그리고 나도 더는 말을 못했다. 【이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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