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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겨냥「북경 정부」실체인정|대만,「적대관계청산」선언 의미와 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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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대 중국 관계>
【대북=전택원 특파원】리덩후이(이등휘) 대만총통은 30일 중국과의 내전상태를 규정해 온 헌법 임시조항(동원감난시기 임시 조관)의 폐지를 선언한다. 이 선언에 따라 대만은 중국을 반란 세력으로 규정한 구시대와 결별하고 대중관계의 새로운 입장모색과 함께 내부의 정치개혁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 선언은 대만의 집권 국민당 정권이 40여 년에 걸쳐 주장해 온 대륙에 대한「법통」을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또 대만이 중국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역사시기에 도전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를 계기로 대만정국과 중국·대만간의 정치·경제관계를 현지취재로 정리해 본다. 【편집자 주】
동원감난 시기의 폐지 선언은 법률상으로 국공 내전의 종결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선언이 있기 전까지 대만은 중국 공산당을「반란단체」, 중국대륙을「피 점령지구」중화 인민공화국을「비적」으로서 평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중국대륙에 대한 반공, 광복」을 내세워 온 대만 국민당은 이번 선언으로 지금까지의 통일노선을「중·대 평화공존과 대화에 의한 통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등휘 정부는 강징궈(장경국) 전 총통정부와 함께 대중 정책에서 국민당정권을 중국의 유일한 정통정부로 주장하고 있으나 ▲중국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이같은 현실을 토대로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활동영역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총통 정부는 중국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논리만 내세우다 결과적으로 고립을 자초했던 종래의 정치체질에서 보다 현실적인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대만이 동원 감난 시기의 종결을 선언한데는 대만·중국의 현실을 토대로 한「2개 정부시대」의 공식화 의도가 뚜렷이 들어 있다.
중국정부는 대만통일을 위해「1국 양제」(중화인민 공화국 주권 아래서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공존)를 제기, 이와 같은 대만의 변화를 진지하게 평가하지 않고 있다.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전기침)이 지난달 27일 전인대에서『대만당국이 국가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환영한다. 그러나 대만이 국제적으로 광범한 경제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의 정치실체로서 이른바「생존공간」을 추구하는 것은 조국의 분열을 일으킬 뿐 통일에 불리한 것이다』고 밝힌바 있다.
중국은 대만의 현실노선 전환에서『대만이 중국을 인정하듯이 중국도 대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대만의 의사를 읽고 이에 대한 거부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만의 이같은「쌍방실체 인정」입장은 지난 2월13일 국가통일 위원회가 발표한「국가통일강령」속에 정리되어 있다.
대만의「국가통일 강령」은 ▲단기적으로 교류 및 호혜 ▲중기적으로 상호협력 및 신뢰조성 ▲장기적으로 협상통일의 3단계에 의한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대만해협 양안의 현상유지를 의미하는 단기단계를 제외한 단계는 실현가능성이 없는「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그 근거로 대만이 고수해 오고 있는 대북 정부접촉·불 교섭·불 타협을 원칙으로 하는 이른바 3부 정책조차 중기단계에서야 해제가 고려되고 있으며 더구나「최고위급의 협상」에 의한 통일과 같은 기대는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10월 총통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한 국가통일 위원회가 불과 5개월만에 성안한 이 강령은 그만큼 통일 명분을 대만정권 유지차원에서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만의「통일강령」은「전 중국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중국과 같은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강령의 통일 기조를「민주·자유·균 부의 중국을 건설하는데」등으로써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이 강령은 교섭과정에서도『상대가 정치실체임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규정, 중·대의 대등 관계를 강조함으로써「1국 양 정부」(하나의 주권 국가 안에 대등한 2개의 정부공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등휘 총통이 88년 취임이후「현실외교」노선을 채택, 이미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국가와도「2중 국교」를 수립하고「탄성외교」를 추진해 온 것도 대만정부의 대 중국 대등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만의「통일강령」이 발표된 직후 중공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즉각 비판에 나섰으며 지난번7기 전인대 제4차 전체회의에서 리펑(이붕) 총리도 대만을 비난하는 반응을 보였다.
중국 최고 실력자 덤샤오핑(등소평) 역시 지난1월『이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중국은 군사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국가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등휘 총통 역시 89년 천안문 사태 당시『중국공산당 폭정은 전체 중국인에 있어 치욕이며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성토한바 있어 양안관계는 경제적 교류 확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론 쉽사리 접근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제교류>
지난 8일의 임시 국민대회가 폭력사태로 얼룩지자 그동안 경기지수 및 투자분위기에서 상승세를 보이던 대만경제는 하루만에 주식시세가 3백58포인트나 급락하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지난해에도 국민대회의 충돌영향으로 대규모의 자금이 해외로 유출됐었다. 대만 중앙은행은 이같은 내정불안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의「내전 상태」종식선언은 이같은 대만 내부 사정이나 중·대간의 정치적 간격을 넘어 대만해협의 양안에 새로운 경제협력 시대를 열 것이 확실시된다.
대만의 자금·기술을 필요로 하는 중국과 중국의 투자환경에 관심이 있는 대만 사이에는 경제면에서 상호보완적이다.
홍콩의 중국계 신문들은『봄의 강물이 따뜻해지는 것을 오리가 먼저 안다(춘강수난압선지)』면서「해협양안 기업가 좌담회」등에서 나타나는 기업가들의 기대와 의욕을 전하고 있다.
87년 대만 측이 대륙방문을 해금한 이래 양안은 경제 . 무역·과학기술·문화방면의 교류에서 안정기조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90년 한해동안, 중·대간 인적교류는 대만에서 중국방문이 95만여 명, 중국에서 대만 방문이 2천6백 명이었으며 중·대간 간접교역은 수출입총계 40억 달러에 달했다. 대륙에 대한 대만계 자본의 투자는 20억 달러로 추계 되고 있으나 실제액수는 이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대만에서 대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복건성에「윤(복건)·태」경제권을 형성해 온 대만자본은 광동-염천, 상해, 화동·화북 등 투자가 집중되어 온 기존지역에서 동북3성 등으로 판도를 넓혀 갈 전망이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해협양안기업가」들은 최근 좌담회 등의 기회를 통해「대만동포」에 대한 비자발급 간소화, 직 항로 개설 및 양안경제 교류 증대를 위한 법적·제도적 대책이 서둘러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잇다.
중국 관변 소식통들은 이같은 요구와 관련, 양안 직항시대가 임박함을 시사하고 있다.
대만의 기륭·고웅과 복건성의 복주, 하문 항의 해운연결, 대북-복주-하문-대북, 고웅-하문-복주 노선의 민항 기 취항이 대만 당국의「도내안전」을 배려하면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만 측은 여전히「3부 원칙」을 내세우며 중국과의 공식 접촉은 기피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반관반민의「해협양안 교류 기금」을 설치한 대만의 국민당 정권은 중국 측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중개기구 설치에 의한」양안국민의 권익 보강방식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관영 신화통신은 26일 대만의「해협양안 교류 기금」이 대만 행정 원 대륙 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경제, 무역, 관광, 일반민사, 범죄 등 양안교류와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게 됐음을 보도했다.
「해협양안 교류 기금」에 대한 중국 측의 반응은『장갑 낀 손으로 악수를 경하는 것』에 비유되고 있다. 중국은 양안교류는 환영하면서도「민간형식」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정치상황>
대만정치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대만의 민주화」로 알려진「헌정개혁」보다 이를 둘러싼 폭력사태에 의해 촉발된 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헌정개혁은 리덩후이(이등휘) 총통이 88년 취임부터 의욕을 밝혀 온 것이다. 30일에 선포되는「동원 감란 시기의 종결」도 이등휘 총통이 지난해 12월25일 공식 표명했던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대만의 정치개혁은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고비마다 폭력사태가 돌발하고 그때마다 대만의 정치상황이 내외의 이목을 끌어왔다.
최근의 헌정개혁이 추진되기까지 대만은 급격한 정치적 변모를 거쳐왔다.
-이같은 정치적 변화는 ▲38년간에 걸쳐 시행됐던 계엄령 해제(1987년) 및 대륙방문 허용▲88년 장경국 총통사망 ▲89년 야당공인 ▲90년 대만 본성인 출신 이등휘 총통 선출 ▲대만의 장래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구하기 위한「국하 회의」소집 ▲지난3월 국 하 회의의 결의를 구체화하는「임시국민대회」개최, 이어서 ▲동원 감란 시기의 종결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국민당정권에 의한 정치 개혁이 추진된 것은 당시 한국·필리핀 등지의 민주화 현상에 자극 받은 한편 홍콩·마카오 반환을 매듭지은 중국이 대만 통일을 향해 정치공세를 필 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국민당 체제가 49년 대륙을 떠나 대만에 정착한 이래 노후화 되어 더 이상 개혁을 미롤수 없을 정도로 한계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민당의 노후화는 대만정부의「법통」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국민대회의「대륙대표 위원」들의 평균 연령이 이미 81세를 넘어서고 있는 것은 좋은 실례가 되고 있다.
대륙 대표위원은 1947년 대륙에서 선출돼 장제스(장개석)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옮겨가 대만정권의 법적 배경으로 존재해 왔다.
대만 재야세력을 대표하는 민진당은 그러나 국민당이「동원 감란 시기 임시 조관」을 폐지하여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이같은 유명무실해진 임시조항 대신 보다 강력한 권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민진당은 국민당이 새롭게「종통 긴급 명령권」「국가안전 회의」「국가안전국」및「인사행정 국」설치 등을 헌법개정에 포함시키려는데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민진당은 이같은 헌법개정을「시체에 혼을 다시 불어넣으려는 것(차시환혼)」으로 풍자한다. 군·경·헌병(「헌법 수호 대」로서 총통의 친위대에 상당)을 시위진압 도구로 삼고, 「늙은 국민대회대표(노국대)등을「표결부대」로 동원하여 일방적으로 국민당 지배강화를 위한 헌법개정을 강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만 인들의 여론은 국민당과 민진당 간의 충돌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다.
지난번 임시 국민대회에서 보인 격렬한 몸싸움과 같은 정치개혁을 둘러싼 양당간의 폭력사태는 헌법개정과 관련된 표면상 이유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대만독립」과「중국통일」이라는「독·통 문제」에서 기인된다는 것이다.
민진당은 이번 개헌을 통해 ▲노국대 퇴진 ▲총통민선 ▲주민투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신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대만 독립의 기반확보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 여론의 시각이다.
이번 의회 폭력사태는 민진당의 이같은 숨겨진 의도가 임시조항 삭제를 통해 자체의 통치력을 강화하려는 국민당의 속셈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86년에 결성된 민진당은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급진파와 국민대표 대회·입법원 등 민의 기관의 전면개선 등 민주화 투쟁을 주장하는 온건파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민진당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만독립과 주민 자결노선 고수에 있다.
지난해 10월 민진당이 당 대회에서『우리나라의 실재주권은 중국 대륙과 외몽고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결의한 것도 국민당의 기본이념인 법통을 부정하고 88년 당 대회의「대만주권은 독립되어 있으며, 중화인민 공화국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이른바「모독」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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