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무시한 「탁상교육행정」/김일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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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고교생의 학기중 학원수강 허용문제가 한동안 논란을 빚다가 결국 현행대로 「수강불허」로 결론이 났다.
당초 논의는 고교의 자율학습이 거의 강제적으로 오후 10시무렵까지 시행되는 데다 찬조금 징수의 빌미가 되는등 폐단이 많아 자율학습을 폐지하고 학원수강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소박한(?) 논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고액 비밀과외를 방지하려면 차라리 학원수강을 허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과 적잖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과외보다는 싼 학원수강을 희망하고 있다는 나름의 판단도 근거가 됐다.
그러나 교육행정조직의 이같은 복안은 교육주체의 하나인 일선 교원들의 여론수렴을 거치지 않은 탁상에서의 발상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교육부는 결론을 내려야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 18일의 시·도교육감 간담회에서 이 문제를 토론주제로 삼았으나 도·농 교육감간에 견해가 엇갈리자 의견서를 제출토록 했다.
의견서를 접수한 결과 서울·부산·대구의 3대도시를 제외한 경남등 12개 농어촌 및 중소도시 교육청이 도·농간 학력격차 심화,심야의 청소년 지도문제 등 부작용을 들어 수강허용에 반대해 대세가 기울었다.
게다가 3대도시 교육청은 의견서를 내면서 일선 교장·교사들의 여론수렴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의견번복 소동을 빚었다. 서울시 교육청의 경우 24일 오전 학원수강 허용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서를 교육부에 보냈다가 이날 낮 교장단이 『학교 교육을 포기하는 처사』라는 항의를 해오자 오후에 부랴부랴 『허용건의를 보류한다』고 교육부에 연락해 오기도 했다.
일선 교원들은 당초부터 학원수강을 허용하면 학교수업 경시풍조가 생겨 고교교육이 파행화 된다는 입장이었으나 교육행정조직의 정책검토과정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촌극은 우리의 교육행정이 여전히 관료적이고 대증요법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교육정책이 가장 중요한 일선에서의 주체인 교원들의 의견에 터잡아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교조의 태풍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교육행정 관계자들은 벌써 잊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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