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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근무에 남은건 “폐인”/고대병원 입원 박수일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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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고통 호소해도 고작 진통제 몇알/중독 밝혀진 후도 부서 안옮겨줘
『15년동안 휴가한번 안가고 결근도 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남은 것은 유독가스에 중독된 몸뚱아리 뿐입니다.』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하다 이황화탄소 중독증세로 23일 쓰러져 고대 혜화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박수일씨(50·경기도 구리시 교문동)는 『직업병이 이렇게 무서운줄 몰랐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박씨가 원진레이온에 입사한 것은 지난 75년으로 처음 배치받은 곳이 실을 뽑아내는 방사과였다.
『공장안에는 항상 뿌연 안개같은 것이 서려 있었습니다. 몇달되지 않아 목이 따끔거리고 눈이 빠지는 듯 아픈가 하면 참을 수 없는 두통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회사측이 박씨에게 준 것은 보안경 하나가 전부였다.
『가스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수 없고 항상 머리가 아프며 손발이 저려왔지만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회사측에서는 진통제 몇알을 주며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박씨는 걸음을 제대로 걷기 힘들고 기억력도 부쩍 떨어져갔다.
90년 2월 회사가 유해부서 근로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검진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이라고 통보받았지만 다른 부서로 옮겨주지 않아 쓰러지기 한달전까지 1년간을 그대로 근무할 수 밖에 없었다.
박씨는 결국 23일 오전 화장실에 다녀오다 하반신마비를 일으키며 쓰러진 뒤에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뇌가 크게 손상되어있어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회사에 일평생을 바쳐 일해온 남편을 몸이 아프다는데도 1년 넘게 그대로 일을 시키다 결국 폐인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박씨의 부인 신홍자씨(50)는 회사측의 무성의한 태도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홍병기기자>
◎퇴사한 뒤 숨진 김봉환씨/7년간 자비 요양하며 줄곧 진정/회사거부로 직업병 인정못받아
경기도 미금시 도농동 원진레이온 회사정문앞에는 이 회사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뒤 뇌출혈증세로 숨진 고 김봉환씨(53)의 유족들이 직업병으로 숨진 사실을 인정하라며 텐트를 치고 26일째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김씨는 퇴사한 뒤 발병,직업병 인정을 받기 위해 쫓아다니다 숨져 직업병여부에 대한 판정을 받지못하고 있는 케이스다.
김씨는 77년 원진레이온 원액2과에 입사,6년간 근무하다 몸에 이상을 느껴 83년 퇴사했다.
그러나 김씨의 상태는 점점 악화돼 7년만인 90년 발음장애등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김씨는 뒤늦게 함께 근무한 동료들도 자신과 같은 두통·언어장애·마비증세 등 이황화탄소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같은해 10월 사당의원 김녹호 원장으로부터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판정을 받았다.
김씨는 이 판정을 근거로 회사에 요양신청을 했지만 회사측은 원액2과가 비유해부서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김씨는 치료를 받지못하는 상태에서 몇달동안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산재처리를 요구했고 결국 노동부로부터 1월5일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한 사실만 확인되면 산재처리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아냈으나 바로 그날 쓰러져 숨졌다.
당시 김씨를 진료했던 사당의원 김원장은 『이황화탄소 중독은 대부분 4∼5년이 지나야 증상이 나타나고 시간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며 숨진 김씨의 경우 사망전 진료결과 분명한 가스중독이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회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숨진 김씨가 계속 비유해부서에 근무했다는 회사측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22일 고려대 김광종교수·노동부 관계자 등이 원액2과의 작업환경조사를 실시,『원액2과에서도 직업병환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회사가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김종혁기자>
◎원진레이온은 어떤 곳인가/인견사 독점생산 공해업체/선진국서 사라진 수동설비 아직까지 사용
원진레이온은 서울근교 미금시 도농동에 있으며 대지 15만평,건평 3만6천평 규모의 공장으로 인견사(비스코스)를 독점 생산하고 있다.
현직 근로자 1천6백82명에 전직 근로자는 1만2천여명이며 매출액은 4백억∼5백억원 규모. 87년 44억원,88년 48억원의 순이익을 내기도 했으나 89년 이후 매년 수십억원씩의 적자를 보고 있다.
59년 화신의 박흥식 회장이 흥한화학공업주식회사로 설립,72년 한국민속촌 정영삼 회장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세진레이온으로 상호가 변경된 뒤 76년 3월 세진직물에 흡수합병됐다가 같은해 12월 이원천씨가 인수,현재의 원진레이온으로 바뀌었다.
당시 화신 박회장은 일본 도레이사로부터 20년 묵은 낡은 기계를 도입,62년부터 인견사를 생산해왔고 그동안 대표적인 후진국형 공해산업체로 꼽혀왔다.
화학섬유에 밀려 적자운영을 계속하다 79년 12월부터 산업은행에서 법정관리하고 있으며 현재 백영기 예비역 육군소장이 대표를 맡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대부분의 레이온회사들이 설립금지조치되거나 무인자동화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원진레이온은 60년대 수동식방식을 그대로 쓰고 있다.
◎나치가 사용한 신경독가스/이황화탄소 정체와 발생과정/펄프 녹일때 사용… 뚜렷한 치료법 없어
이황화탄소(CS□)는 레이온사의 원료가 되는 목재펄프를 녹일때 사용된다.
냄새가 없고 연한 노란색 액체로 펄프용액이 레이온사로 방사되는 과정에서 기체로 바뀌며 이때 또다른 펄프용제인 황화수소(H□S)와의 혼합반응때문에 심한 악취를 풍긴다.
2차대전 당시 나치가 살상용 신경독가스로 사용한 적이 있으며 대부분 폐를 통해 흡수되고 일부는 피부로 들어간다.
높은 농도로 한차례 마시면 최면증세를 일으키고 반복 흡입할 경우 신경과민·소화불량·수면장애 등을 유발한다.
미국에서는 근로자들이 만성중독증세로 나타나는 신경과민,시력장애,성기능장애,체중감소,두통,심장·간·콩팥 등 장기이상을 「의사책임아래」 체크하도록 하고 있으나 뚜렷한 치료법이 없어 일단 중독되면 증세악화·사망이 우려된다.
국내에서는 1차 스크리닝에서 혈압·오줌속의 유로빌리노겐과 당·혈액속의 망상구·신경 등 5개 항목만 체크하고 이상이 있을 경우 2차 스크리닝 단계로 넘어간다.
농도별 인체위해도는 동물실험을 인체에 적용해 얻은 연구결과로 1백∼2백PPM 등 높은 농도에서만 입증됐을 뿐이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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