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 개혁, 보수 = 기득권 틀 이젠 사라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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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고대훈 사건사회 데스크

386세대 정치인들(1월 3일자 1, 4, 5면)에 이어 1987년부터 10년 간격으로 대학에 입학한 세 사람이 좌담회를 열었다. 최수영(39.서울대 정치학과 87학번) 변호사, 나란희(29.한양대 전기전자공학부 97학번) LG전자 연구원, 박재한(19.고려대 임상병리학과 07학번 입학 예정)군이 참석했다.

마지막 386세대(최 변호사)와 포스트 386세대(나 연구원.박군)인 이들은 80년대 초반 학번의 386세대와는 달랐다. 민주화에 대한 인식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20년 전 386세대는 민주화 쟁취를 위해 온몸을 던졌다. 반면 이들은 민주화를 당연한 권리이자 삶의 일부로 인식했다. 이념.통일.운동권이란 단어가 386세대를 상징했다면 이들은 현실에 바탕을 둔 실용주의와 글로벌리즘을 추구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에게서 한국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나란희 연구원, 최수영 변호사, 박재한군(왼쪽부터)이 지난해 12월 27일 본사에서 만나 87년 민주항쟁 이후 달라진 우리 사회와 민주화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사진=변선구 기자]

-고대훈 데스크(사회)=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지 20년이 흘렀다. 여러분이 체감하는 민주화 수준은.

▶최수영(87학번)=대학에 입학한 1987년은 반독재 구호만 외쳐도 경찰에 끌려가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군부독재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셈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언론.집회.사상.양심의 자유는 거의 선진국 수준이다. 불만이나 문제가 있으면 법에 호소할 수 있는 투명성도 높아졌다.

▶나란희(97학번)=윗세대의 헌신 덕에 민주화의 열매를 한껏 누리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요즘엔 책임과 의무보다 자유와 권리만 앞세우는 현상이 늘어 실망이다. 방종이라는 단어까지 떠오른다. 과거엔 정통성 없는 권력이 법과 질서를 유린해 문제였지만 이젠 사사로운 이해관계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훼손되는 게 문제다.

▶박재한(07학번)=솔직히 불법 시위와 집단 이기주의 같은 민주주의의 부작용이 더 눈에 띈다. 선배들이 외쳤던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법과 질서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사회=87년 시위는 권위주위 정권에 맞서 시민.학생.노동자에다 '넥타이 부대'까지 가세한 민주화 운동이었다. 민주화가 정착된 요즘에도 폭력 시위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최=80년대엔 2~3명만 모여도 잡아갔다. 따라서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집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시위대의 폭력은 어느 정도 용인됐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절차에 따라 신고만 하면 안전하게 집회를 치른다. 문제는 폭력으로 여론의 관심을 끌려는 무의식적인 관성이다.

▶나=휴일 종로 등 도심 복판에서 교통을 막고 자신의 요구를 외치는 이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시민 불편을 유발하는 방식은 시위대에 대한 반감만 높일 뿐이다.

▶박=지금은 21세기다. 인터넷을 활용한 여론 환기나 서명운동 등 비폭력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데 과거 같은 대중 집회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회=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는 이념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최=진보와 보수 의미조차 헷갈린다. 누가 무엇을 바꾸려는지, 무엇을 지키려는지 선명하지 못하다. 진보를 내세우는 전교조나 민주노총의 조직 체계를 보면 상당히 관료적이다. 갈수록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허구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념 대결은 나 같은 생활인에겐 관심 밖이다. '또 싸우나'하는 느낌뿐이다. 정치권은 국민이 진짜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을 생산하는 데 노력해 줬으면 좋겠다.

▶박=나처럼 어린 학생에게 '진보=개혁, 보수=기득권'이라는 이미지는 사라졌다. 대화와 협력보다 말싸움을 즐기는 이념 갈등이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만 키우는 것 같다.

-사회=지난해 대학 학생회에서 비운동권 후보들이 잇따라 당선된 게 화제였다.

▶최=87년 3월 입학하자마자 선배 손에 이끌려 시위하는 데 나갔다. 그땐 학생회와 학생운동이 대학생활을 지배했다. 학생 다수의 관심이 군부 독재 타도였던 그때는 당연했다. 우리 세대는 대학 4년간 운동권 투사로 살아도 막상 졸업할 때가 되면 취직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학생들의 관심 1순위는 취업과 학업이 아닌가. 시대상황이 달라진 데 비해 학생회가 변화에 둔감했던 것 같다.

▶나=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학생회와 일반 학생의 괴리는 심각했다. 10명 중 2명 정도나 운동권 언저리에 있었을까. 하지만 학생회는 이념운동만 지향했다. 학생회가 학생 대표기관이라면 다수의 뜻에 맞춰 가는 게 옳다.

▶박=솔직히 우리 세대는 운동권.이념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관심도 적다. 하지만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대학 사회에서 사라져선 안 될 것 같다.

-사회=북핵 문제로 시끄럽다. 북한은 어떻게 바라보나.

▶최=일단 동포라고 생각한다. 이산가족 문제 등 한 민족, 한 핏줄이라서 안고 있는 특수성이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까지 버려가면서 북한과 협력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나=북한 핵실험에 충격을 받았다. 탈북자 수가 늘고 경제가 어려운데도 군비를 증강하는 북한 지도부를 이해할 수 없다. 북한 주민과 북한 체제.지도부의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늘리되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은 일부 경협사업 등은 재검토해야 한다.

-사회=세대.계층에 따라 대북관.통일관도 크게 차이 난다.

▶최=전시작전통제권 논쟁, 간첩 사건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일반 국민과 동떨어진 인식을 가진 일부가 확실히 존재한다. 반면 사상의 경쟁을 허용할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는 생각도 했다. 또 예상외로 건전한 보수가 더 많다는 걸 느꼈다.

▶나=통일이나 남북 화해가 양자에게 도약의 기회를 줄 거라 믿는 편이다. 하지만 통일이 되면 어떤 실익이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작정 통일하자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

▶박=솔직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말고는 통일에 대해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다. 통일이 되면 지금보다는 강국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정도다. 어린 세대에게 무관심하다고 꾸짖기보다 왜 통일이 필요한 것인지 현실 속에서 짚어줘야 한다.

-사회=87학번에서 07학번에 이르기까지 입시 과열과 공교육 황폐화는 더욱 심해졌다.

▶최=획일적인 공교육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과외 등 사교육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대신 국가가 사회적 취약 계층의 교육 여건를 개선하는 데 집중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사교육을 때려 잡자'식의 땜질 처방으론 안 된다.

▶박=학교는 학생과 부모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학생들이 학교 수업에서 졸고 학원에서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게 사실이다. 학교는 학원처럼 학생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업 내용과 가르치는 교사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학생 수준에 맞게, 학생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사회=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최=한국은 식민 통치와 전쟁 상처 속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다. 우리 국민은 근대 국가를 세운 지 40여 년 만에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에서 외환 위기를 가장 빨리 벗어났다. 국민의 다양한 '끼'와 능력을 조정.통합하는 리더십만 자리 잡힌다면 순조롭게 발전할 것으로 믿는다.

▶나=얼마 전 프랑스 출장 때 내가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를 보고 외국인들이 '역시 한국 제품'이라는 경탄을 들을 때 가슴 뿌듯했다. 나라가 위기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2002년 월드컵을 떠올린다. 거리로 쏟아져 함께 응원하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한국은 어떤 위기도 극복할 것 같다는 믿음이 든다.

▶박=어른들은 우리 세대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고 우려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도 오늘날 누리는 민주주의가 목숨을 걸고 독재와 맞서 싸웠던 80년대 선배들 덕분인 것을 배워왔다. 또 아버지 세대가 일군 '한강의 기적'덕에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이를 기억하는 우리 세대 역시 대한민국의 미래에 기여할 새로운 시대적 책임을 기꺼이 떠맡을 것이다.

-사회=올해는 대선의 해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통령상은.

▶최=말 잘하는 사람보다 국민의 목소리를 잘 듣는 인물이 당선되길 바란다. 말솜씨를 뽐내는 것보다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듣고 통합할 수 있는 후보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나를 따르라'식의 리더십보다 경제 발전을 이끌면서 사회 갈등을 봉합.치유하는 능력을 갖춘 '전략적 CEO'가 나오면 좋겠다.

▶나=인기몰이를 위한 임기응변 정책엔 지쳤다. 기발한 정책을 많이 내놓는 것보다 다음 대통령도 계속 밀고 나갈 올바른 정책을 내놓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겠다.

▶박=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튀는 발언으로 TV에 자주 나오는 것보다 가끔 나와도 존경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는 대통령이 뽑혔으면 한다.

정리=천인성 기자<guchi@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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