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목매기로 했죠 사랑엔 … 그럴 것까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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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6년이 지났는데도 영화 '친구'의 진숙이로만 기억해 주시는 분이 많아요. 하나에 집중하겠다는 마음으로 일 년에 한 작품씩만 했는데 흥행에 실패한 때문이었겠죠. 처음에는 다른 사람 원망도 했어요. 하지만 제게 연기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어요. 이제는 확신해요. 연기가 나의 인생이란 걸."

'친구'에서 '연극이 끝난 후'를 멋지게 불러 유오성과 장동건의 혼을 빼놓던 그룹 '레인보우'의 진숙이, 김보경(31.사진). 진숙이는 화통한 '날라리' 같으면서도, 끝내 속내를 비추지 않는 묘한 여자였다. 스물다섯 나이에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던 첫인상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2002, 2003년 김보경이 택했던 '아 유 레디''청풍명월'은 그해의 대표적 흥행 참패작으로 꼽혔다. "영화는 안 됐지만 긍지는 있어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판타지.무협 영화였거든요."

1m70㎝의 키에, 이목구비의 선이 고운 조막만 한 얼굴. 여기에 연기에 대한 의욕까지 넘쳐흐르는 이 여배우는 유난히 작품 운이 없었다.

그러나 2007년은 그에게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듯하다. 김보경은 6일부터 방영되는 MBC-TV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주인공 준혁(김명민 분)의 애인이자, 암투를 벌이는 의사들을 제3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와인바의 여주인 희재로 나온다. 흰 가운을 입고 수술 경합을 벌이는 의사들, 실제로는 연기에서도 경쟁을 벌일 김명민.차인표.이선균 등 남자 배우 사이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역할이다.

'하얀거탑'은 일본의 같은 제목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 대학 병원을 배경으로 성공만이 목표인 외과의사, 정치에 능한 병원 경영진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듯 사실적으로 그려낼 예정이다.

또 18일 개봉하는 영화 '여름이 가기 전에(감독 성지혜)'에서는 모호한 태도만 보이는 이혼남 민환(이현우 분)에게 매달리는 소연을 연기했다. 매력적인 이혼남과 순진한 젊은 남자 사이에서 거짓말까지 해 가며 갈팡질팡하는 29살 아가씨의 심리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다.

촬영 시차는 있지만, 김보경은 사랑의 무의미함을 알아챈 농염한 와인바 여주인과 속마음을 모르겠는 남자에게 울며 달라붙는 속 없는 싱글 사이를 오간다.

"희재는 저보다 성숙하고 지적인 여자예요. 사랑에 대한 집착도 없고요. 반면 소연이를 보고 있으면 속이 터져요.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도 뜨뜻미지근한 민환에게서 전화 한 통화만 와도 무너져내리니 말이에요."

실제의 김보경은 어떤 인물에 더 가까울까. 그는 "죽을 때까지 연기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결혼이야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겠지요. 사랑에 그렇게 목매지는 않아요"라고 답했다.

그는 요즘 명상에 푹 빠져 지낸다고 했다. "연기를 위해서라면 춤이나 노래 같은 것을 더 연습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명상을 하며 나란 존재를 찾아보는 게 내면 연기를 위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연기는 삶의 전부"라고 외치는 이 여배우. 왜 이런 열정이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정신 차린 게 얼마 안 돼서겠죠." 남의 이야기하듯, 인기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말했다.

김보경은 최근 소속사를 옮겼다. "'여름이 가기 전에'를 하면서 지금 소속사 사장을 만났어요. 언니.동생하며 지내는데 그분 소속사에는 실력 있는 연극 배우들만 있는 거예요. 그 속에 있으면 연기에 대한 갈증이 좀 가셔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연기를 했지만 아직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먼저 전화를 걸었지요."

김보경과 동갑이자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마녀'로 나왔던 고수희 등이 소속사의 한 식구다. 김보경은 요즘 이들을 괴롭힌다. 집에 돌아와서도 대본을 들여다보다 답이 안 나오면 "미치겠다"며 동료를 찾아 새벽에도 연습실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배우 장원영씨가 특히 많이 도와줘요. 제가 머리를 싸매고 가면 '네가 연기할 인물을 사랑해라. 느낌에 빠져라'라고 이야기해 주죠"라고 밝혔다.

갈 길을 찾고 났더니 시간이 아깝기만 하다는 김보경. 지금의 마음 자세라면 자신이 올해 목표로 삼고 있는 연극 출연 등 그의 행보는 어느 때보다 빠르고, 또 빛날 듯했다.

글=홍수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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