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정신지체 … 그러나 사랑하고, 악쓰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그녀의 몸은 스무 살이지만 정신은 일곱 살에 멈춰버렸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당연히 불행이겠지만 영화 '허브'(11일 개봉, 허인무 감독)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유치원 꼬마들과 어울려 다니는 상은(강혜정)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밝고 강하다. 철부지 의경 종범(정경호)과 사랑을 하고, 암에 걸린 엄마(배종옥)와의 의젓한 이별도 준비한다.

얼핏 장애 극복 미담의 주인공 같은 역할이지만 강혜정을 거치니 풍성한 캐릭터가 됐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모든 여배우가 기피하는 정신지체 소녀 여일을 맡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로 바꾸어놓았던 그녀다. 연인 조승우와 동반 출연한 '도마뱀'에 이어 이번에도 '착한 영화'를 택한 이유는 무얼까. "상은처럼 사람을 정화시키는 기운이 내게 필요했다. 그런 기운을 갖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쓰러울 정도로 작고 마른 몸. 영화 속 그녀는 스물넷 실제 나이가 무색하게 진짜 아이 같아 보인다. 한동안 성형수술 논란에 결별설까지 여러 루머에 맘 고생이 적잖았을 그녀지만 "웃음으로 모든 걸 극복했다"며 기운차게 팔랑거렸다.

-착한 영화라, 현장 분위기도 착했겠다.

"유치했다(웃음). 감독님, 배우, 스태프 모두가 어른애가 돼서 고자질하고, 서로 자랑하고 그랬다. 나는 상은처럼 종이접기를 하고 놀고. 각자 자유롭게 즐기면서 수다 떨고 장난친 발랄한 현장이었다."

-서로 별명도 있었다는데.

"각자가 즐기는 주류로 이름을 대신했다. 배종옥 선배님은 '사춘선배님'이었고 나는 '분자', 경호는 '세주'였다.'탄주'도 있었다."

-정신지체 연기라, 여배우에겐 쉽지 않은 선택이다.

"정신지체지만 밝은 성격이라는 점이 끌렸다. 사랑을 한다는 설정도 좋았고. 그저 착하기보다는 잘못된 일에는 맞설 수도 있는 괜찮은 친구라고 이해했다."

-연기에 참조한 작품이 있다면.

" '빅''구니스''스탠바이 미''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 감독님이 참조하라고 하신 영화는 많았다. 감독님한테 혼날 얘긴데, 사실 예전에 본 영화들이라 따로 보진 않았다. 감독님 자체가 상은 같은 느낌이어서, 감독님이 낸 숙제보다 감독님을 연구하는 게 더 도움이 됐다. 상은의 혀짧은 말투는 내가 고음에 비음이라 유리한 조건이었다. 20여 회 리딩하면서 잡아갔다."

-연기파 배종옥과 강혜정의 만남이라는 점도 화제였다.

"배종옥 선배님은 모든 여배우가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배우다. 함께 연기하는 게 행복해 촬영 날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흡착력이 대단한 배우시다. 진짜 내 피를 끓게 하셨다. 함께 연기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내 가슴을 쑥 헤집고 당겨내는 느낌이었다. 소름 돋을 정도의 교감이었다."

-힘든 점이 있었다면.

"육체적인 부분이다. 극중 비 맞는 2~3분 장면을 일주일 내내 촬영했다. 나중엔 티셔츠가 쪼그라들어 옷감을 중간에 대고 늘여 입기까지 했다. 여름비가 그렇게 추울 지는 상상도 못했다. 실제 비오는 날 비 장면을 찍기도 했는데,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촬영이다. 상은이가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의 팔뚝을 물어뜯는 설정이라 주변 사람들 팔뚝이 전부 퉁퉁 부어올랐다. 정말 죄송하다."

-상은이 동화 속 주인공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손가락 크기로 작아진 강혜정이 인어공주, 신데렐라, 장화 홍련 등 캐릭터 분장을 하고 동시출연한다).

"원래는 애니메이션으로 하려 했는데 촬영 감독님이 아이디어를 냈다. 기술적 어려움 속에서 아주 잘 나왔다. 내가 연기를 하면 스태프들이 체조경기처럼 점수표를 들고 6.4, 10점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매기기도 했다.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는 장면이라 자부한다."

-성형 논란으로 마음고생이 컸겠다.

"건강 때문에 한 일(교정을 뜻하는 말)이니 후회는 없다. 내가 지금 스물넷인데 마흔 넘어 자서전을 쓴다면 지금 나이는 두세 쪽 분량도 안 된다. 될수록 많이 웃었고, 내가 웃음으로 에너지를 많이 얻는 사람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다행히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인터넷을 안 한다."

-차기작은.

"황수아 감독의 '세탁소'다. 코인세탁소를 무대로 한 탈주범과의 사랑 얘기다. 탈주범역은 아직 미정이지만 캐릭터가 진짜 멋지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걸 후회한 두 번째 캐릭터다. 첫 번째는 '올드보이'였다. 비열함을 젠틀함으로 풀어낸 유지태 오빠를 보며 정말 질투가 났다."

글=양성희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