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으로 맞는 고르비(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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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소련은 KAL기 피격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라.』
『희생자의 유해와 유품을 반환하고 피해배상을 즉각 실시하라.』
18일 오전 10시 서울 양화동 인공폭포앞. 83년 9월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의 유족 30여명이 「KAL기 피격진상규명 촉구대회」를 열고 있었다.
전국이 고르바초프의 방한으로 들떠있는 가운데 이들은 소복차림의 침통한 표정으로 분노에 찬 구호를 외쳤다.
『지금이라도 아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습니다.』
당시 미국 출장을 다녀오던 아들을 졸지에 잃어버렸다는 조병례 할머니(67)는 최근 일부 승객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 같다는 보도를 보고 난뒤 더욱 『혹시나…』하는 마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고 울먹였다.
『일본이 북방도서 반환문제를 떳떳하게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지나치게 저자세외교를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8년동안 죄인처럼 지낼 수 밖에 없었다는 한 유족은 『KAL기 피격당시 조기까지 내걸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북방외교를 외치며 이제는 잊어버릴 때가 됐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배신감마저 느꼈습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1m쯤 크기의 고르바초프 얼굴그림이 나무판위에 걸려지자 준비해간 계란을 던지기 시작했다.
계란세례가 10여분간 계속되는 동안 유족들의 흐느끼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계란 2백여개는 동이 나버렸다.
오전 10시40분쯤 유족들은 집회를 마친뒤 『고르바초프를 직접 만나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며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했지만 이들의 뜻이 이루어질리가 없었다.
유족들이 떠난 자리에는 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띤 고르바초프의 초상화가 반쯤 찢겨진채 여전히 걸려 있었다.<홍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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