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알뜰 주부의 지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벌써 사흘째 밥상에 김치를 올리지 못했다. 매끼 수저를 드는 세 아이들과 남편의 표정을 훔쳐보며 혹시나 하게 될 반찬투정에 변명을 준비했건만 별 말들이 없다.
지난해 김장때 직접 엮어 말려 두었던 시래기 잎을 삶아 국을 끓이고 콩자반·멸치 볶음만으로 밥 한 공기씩을 비우는 게 그저 고맙기만 하다.
이처럼 우리 집 반찬이 부실한 원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가 주범(?)이다.
올 들어 지난 3개월 사이 소비자 물가가 4.9%나 올랐고 이같은 현상은 지난 80년 이후 11년만의 물가 오름세라고 신문들이 보도하고 있지만 주부가 피부로 느끼는 식품 비의 급등은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아침저녁 다르게 겁나게 뛰는 물가 때문에 알뜰 살림을 위한 지혜도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아내와 엄마의 임무마저 포기하고 싶기까지 한 것이 요즘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고 하여 정말 주부로서의 임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여자로 태어난 숙명이고 보니 세 명의 내 사랑스런 분신과 남편을 위해 살림을 살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내 몫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땅속에 잘 보관된 봄용 소금 김장 김치와 짠지가 반찬걱정을 덜어 줬으나 그것도 다 끝나 버렸다. 요즘처럼 반찬 걱정으로 심각했던 때가 또 있었던가 싶게「고삐 풀린 물가」로 주부가 겪는 마음 고생은 여간 큰 게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는 지수상의 4.9%인상률과는 너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파·마늘·시금치·야채류 등은 정말 작년보다 배쯤은 오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견물생심(견물생심)이라니 시장 보기를 억제하여 5∼6일만에 장보기를 해보지만 그런 약은꾀도 별 효력이 없다.
엊그제만 해도 1개에 3백∼4백원 하던 감자는 5백원을 줘야 하고 계란크기의 양파1개에 6백원을 줘야 하는가 하면, 풋고추 5개에 1백50원씩이나 하니 1만원을 가지고도 무엇을 샀나, 도둑맞은 것은 아닌가 하여 몇 번씩 계산을 다시 해야 할 정도다.
이럴 때는 덜 쓰기 차원을 넘어 안 쓰는 수가 제일이겠으나 그렇지 못한 것이 가계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물가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생각 끝에 값싸고 영양가 있는 식단을 짜고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첫날인 오늘, 콩을 믹서에 갈아 시래기를 넣어 끓인 콩 탕을 상에 올리니 남편과 세 아이들이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맛있다며 내일 또 해 달란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나는 고물가시대의 살림은 역시 주부의 지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뭔가 또 값싸고 영양가 높은 식품을 골라 가족들의 입맛에 맞춘 메뉴를 개발해야겠다.
정순희<인천시 남구 주안2동554의3>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