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더 바쁜 작은 영웅들 이들이 있어 든든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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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새해를 맞이하는 3일간의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대다수 시민은 일터를 잠시 떠나 가족.친지와 함께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하겠지요. 그러나 이 순간에도 우리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 현장을 지키며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작은 영웅들'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사진=안성식.강정현기자.양영석 인턴기자

박재철 지하철 기관사
지하서 또 새해 맞아
"술 취한 승객 많아 비상"

지하철 기관사들은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새해를 맞는 경우가 많다. 서울도시철도공사 박재철(37.사진)씨는 유독 그런 편이다. 1994년 입사 이후 막차를 운행하며 가는 해를 보낸 것이 여섯 번, 새해 첫차를 운행하며 오는 해를 맞이한 것이 네 번이다. 올해도 31일 밤 12시부터 1월 1일 새벽 2시까지 모란과 암사를 오가는 서울 지하철 8호선의 마지막 열차를 운행한다. 비록 근무 순서에 따른 것이지만 '지독한 팔자'이기도 하다.

박씨는 "각종 연말 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승객들을 보면 왠지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그럴 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가족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 초 아내가 불평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시민의 발 역할을 하는 남편을 십분 이해해 준다"며 "9살, 6살짜리 두 아이도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50대 아주머니가 기관실 창을 두드리더니 "고생 많다"며 내민 찐 감자 덕분에 행복했다고 한다.

박씨의 올 한 해가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용인시에서 8000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는 그는 "직원들이 모이면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부동산 얘기로 흘러가더라"며 "집값이 몇 억씩 올랐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새해 소망도 단연 경기 회복과 집값 안정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기관사에게 막말하는 무뢰한이 많이 준 것을 보면 시민의 의식 수준은 크게 향상됐다"며 "하지만 밥그릇 챙기기와 편가르기에 골몰하는 '윗사람들'때문에 우리가 힘든 게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연말연시 술에 취한 승객들이 플랫폼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잦다.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권호 기자

김창곤 강북서 산악대장
인명 구조 24시간 대기
"일출 산행 조심하세요"

"늘 등반객을 살펴야 할 처지라 맘 편하게 연휴 보내기는 틀렸죠."

29일 오후 서울 북한산 국립공원 인수봉 암벽. 신참 대원에게 암벽타기를 가르치던 김창곤 강북경찰서 산악구조대장(38.경사.사진)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주변 등산객의 밝은 표정과 달리 김 대장의 얼굴엔 긴장감이 감돈다.

산악구조대는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주변에서 사고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만 이곳에선 총 161건의 사고가 발생해 8명이 숨지고 1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특히 매년 새해 연휴엔 첫 일출을 보러오는 사람들 때문에 북한산은 발디딜 틈조차 없다. 그만큼 사고 발생 위험도 높아져 구조대로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김 대장은 "겨울엔 발목 골절 같은 작은 부상에도 산 속에 고립되기 쉽다"며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확률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1996년 경찰관이 된 그는 수차례 지원 끝에 2003년 초 이곳 구조대장으로 부임했다. 93년 해군 하사관 시절부터 암벽을 타 온 그는 산을 벗하며 경찰의 소임도 충실히 할 수 있는 구조대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 대장은 "올 새해 연휴도 휴가답게 보내지 못할 것 같아 아내와 두 아들에게 미안하다"며 "하지만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천인성 기자

심현보 산림청 헬기조종사
언제든 비상 출동태세
"불은 연휴 안 가려요"

산림청 산하 산림항공관리본부 심현보(47.사진) 기장은 새해 첫날 '애기(愛機)'인 러시아제 KA-32T 헬기 곁에서 출동 대기를 해야 한다. 산불 진압, 인명 구조, 항공 방제, 화물 수송 등 다양한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림항공관리본부 헬기는 긴급상황이라면 비나 눈이 많이 내려도,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출동한다. 2000년 동해안 산불 때는 열흘간 100시간 비행을 하기도 했고, 지난해 양양 산불엔 시속 60 노트의 강풍에서도 헬기를 몰았다. 그래서 심 기장은 집에서 나올 때 가족에게 "다녀올게" 대신 그냥 "간다"라고만 얘기할 때가 더 많다.

'24시간 대기 후 하루 휴무' 근무를 하는 데다, 남들이 쉬는 새해 연휴 기간에는 산불이 날 가능성이 커 비상 대기를 해야 한다. 그는 "올해엔 대형 산불이 많지 않아 예년보다 괜찮았다"며 "산불이 잦은 겨울철이라 긴장을 풀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임무 중 솔잎흑파리나 소나무 재선충을 막으려 농약을 뿌리는 항공방제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농약이 바람을 타고 기내로 들어오기 때문에 비행 전 모든 틈을 다 막는다. 바깥 온도가 30도가 넘을 경우 기내는 50도를 웃돈다. 올해 7월 29일 항공방제 비행 중 동료인 이재익(49) 기장이 추락해 사망했다. 심 기장은 "그달에 이 기장과 함께 수해 때문에 강원도 한계령.설악동.오색약수 등에 고립됐던 150명을 구조해 낸 뒤 둘이서 '조종사인 것이 보람 있다'고 얘기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육군 복무 시절 15년간 2100시간 비행을 한 심 기장은 산림항공관리본부에서 11년째 헬기를 타고 있다. 그는 "힘들고 고되어도 아름다운 우리 산하를 내려다보는 맛에 비행을 한다"며 "내년에도 큰 불상사가 없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seajay@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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