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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0)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1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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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후 우리들이 매복중인 비행장에는 눈보라가 뿌리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새벽에 난주를 떠났다는 미군 낙하산부대는 기습해 올 것 같지도 않다.
당시 레이다 시설이 없던 일본군은 스파이로부터 미 낙하산부대가 이륙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그 후는 행방을 쫓지 못한 모양이다.
그사이 나는 천바이랑으로부터 받은 『조선동포에게 고하는 격려문』을 몇 번이나 읽어보고 루흔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조선동포여 어서 항일전선으로 달려 오라!』는 그 격려문.
후에 알게됐지만 당시 내가 있던 곳은 1941년 1월10일 우리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화북(북지) 조선청년연합회」가 발족했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즉 산서생 진동남 (지명) 태행산맥 기슭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중국 각지에서 활약하던 우리독립운동가들은 중국혁명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즉 중국이 항일전쟁에 승리하면 우리 조선해방도 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중국혁명운동에는 물론이요, 중공군의 무력항거에 가담한 사람도 많았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8월15일 산서생 요현에서 발전적 해산을 결의하고 대신「조선독립동맹」의 결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 밑에 있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또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민족운동은 좌우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사상이나 주의보다는 독립쟁취를 목적으로 그 궤도를 같이하고 있었다.
즉 좌·우익을 막론하고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는 것이 공동목표였던 것이다.
1941년10월 국제적 반파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대표대회」에 김구 선생은 대회명예 주석단에 들어 있었고, 또 독립동맹의 「진서북분맹성립대회」에는 손문·장개석·모택동·편산 잠 (일본공산당원로)의 초상화와 함께 김구 주석 초상화가 걸렸던 것도 좌우공동연합의 예다. 유일한 목표는 오직 「타도일본제국주의」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해방 후 김일성에게 버림받은 김무정 장군이 있다. 그는 1934년 20세기의 기적이라는 중공의2만5천리 「대장정에도 참가했고 중공군 포병 총사령관으로서 중공군 포병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무정이었으니 「조선독립동맹」에서 주역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장개석 지역에서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활약했던 국어학자 김요봉이나 장개석 국부군의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김원봉이 왜 중공군으로 옮겨가서 김무정과 함께 「독립동맹」을 했는지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그것은 전문가들이 다룰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만두고 얘기의 본 줄거리로 돌아간다.
「조선동포여! 한시 바삐 우리 항일전선으로 달려 오라!」는 격려문을 두 손에 움켜쥐고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리 동포들은 이토록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을 때 나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며 「우리는 황국(일본) 신민입니다. 충성을 다하여 천황폐하의 성덕에 보답하겠습니다」는 소위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있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던가.
「황국신민의 서사」는 일제 말 조선에서 학교나 관청에 다닌 사람치고는 누구를 막론하고 아침저녁 앵무새처럼 외워야 했던 것이다. 참으로 잊고 싶은 악몽이다.
이 「황국신민의 서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생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그 출생비화를 쓰겠는데 그야말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다.
이 「서사」의 원작자는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친일파 김대우(경북·전북지사, 중앙정보위원, 광주보호관찰심사위원)였다.
김대우는 또 다른 친일행위를 하기 위해서 농촌청년들을 모았는데 그 청년들에게 정신적 기둥으로 삼고자 만든 것이 바로 이「서사」였다. 그것을 본 조선총독 (남 매낭)은 격찬하면서 자기에게 양보해 달라고 했다.
김대우는 원문 그대로를 고스란히 총독에게 바쳤다.
얼마 후 그것이 「황국신민의 서사」로 둔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보급하는데는 오림 승우 (이승우·변호사·중추원 참의) 하산 무 (조병상·종로경방단장·중추원 참의) 박희도 (3·1운동변절33인·동양지광사장=사상개조업) 가산 인 (최 인·변절33인·매일신보 사장) 윤덕영 (한일합병공노자작) 등을 앞세웠으며 특히 교육계에서는 평소 총독부 방침에 앞장섰던 박관수 (경기고교장, 5·16후 반공연맹 이사장) 와 중앙방송국 팔번 창성(노창성)의 노력(?)이 지대했다.
8·15후 김대우는 관계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친일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들겠느냐』며 끝내 사양, 자숙했다.
김대우를 취조했던 반민특위조사관 백재호씨는 반민자 중에서는 그래도 김대우가 『가장 양심적이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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