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절제된 音으로 쇼팽의 숨결 되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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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피아니스트 백건우(57)씨가 프레데릭 쇼팽(1810~49)이 폴란드 바르샤바 시절 작곡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전곡을 CD에 담았다. 쇼팽의 음악 일생을 고향 폴란드에서 지내던 20세까지와,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기로 나눌 때 이는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이번 음반에 대해 음악평론가 한상우(65)씨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편집자]

음악 평론가 한상우씨가 먼저 말을 건넸다. "감나무 잎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백건우씨 음반을 들으니까 이 만추의 계절에 잘 맞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사실 백건우씨는 라흐마니노프.슈베르트 등 많은 음반 작업을 해왔지만, 쇼팽 음반은 처음 아닙니까. 게다가 구하기 어려운 쇼팽의 스무살 이전 작품에서는 청순한 사랑이랄까, 자연이 느껴지죠"라고 덧붙였다.

백씨의 이번 음반은 희귀 레퍼토리인 '크라코비아크''폴란드 춤곡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포함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한 것으로, 이는 1972년 클라우디오 아라우 이후 처음이다. 이에 백건우씨는 "초기 쇼팽 음악에 대한 애착은 노스탤지어일 수 있겠죠. 이 곡들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어린애 같은 순수함을 어떻게 이렇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답했다.

다시 이어지는 백건우씨의 말-. "쇼팽을 다시 한번 눈을 부릅뜨고 학구적으로 재조명해고 싶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의 쇼팽과의 인연은 꽤 깊거든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한상우=1961년 15세에 도미할 때 한국에서 마지막 연주를 쇼팽만으로 했었죠? 12세 때 방송에서도 쇼팽 세곡을 연주했었고. 또 유럽 첫 연주에서도 쇼팽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백건우=쇼팽의 생가에 가서 피아노도 만져보고 쇼팽이 크라코비아크를 썼던 바르샤바 아파트도 가보았죠. 내 방, 내 피아노가 생겼다며 쇼팽이 기뻐하던 그곳에서 쇼팽의 체취를 느껴봤습니다. 그러나 이번 음반 작업에서 가장 도움을 준 것은 악보였습니다.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판본 악보를 그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한 할머니가 일일이 복사해 보내주었죠. 그걸 놓고 공부하며 쇼팽이라는 한 인간과 가까워졌고, 그가 살아나는 것 같고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쇼팽의 젊은날의 정신세계는 마치 혼탁한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같습니다. 자기 과시, 과욕으로 흐르는 세상에서 청순함은 무엇일까를 표현해주는 거죠. 참 이번에 같이 연주한 오케스트라가 바르샤바 필하모닉이었죠. 지휘자 안토니 비트는 백건우씨와 18번이나 같이 연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무엇보다 가장 신경쓴 것은 악기 선택이었어요. 제가 선택한 그 피아노가 강하고 풍부한 소리는 아니지만 청결하고 예민한 소리를 가지고 있더군요. 그리고 뉘앙스를 제 뜻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녹음할 때도 데카(Decca) 팀에 무리 없는 소리로 잘 다뤄달라고 요청했어요. 그것은 쇼팽 자신의 부탁이기도 해요. 제자들에게 소리는 물같이 흘러야 한다고 끊임없이 얘기했으니까요. 사실 악보에 적혀 있는 소리를 내면 아무리 작아도 다 들려요. 어쿠스틱의 모자란 점마저 뚫고 그 메시지가 전달되는 거죠. 손이 공중에 떠있을 때라도 음악이 흐른다는 게 그런 말인가봐요.

▶한=연주자가 원작에 깊이 몰입하면서 작곡가의 본래 생각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이번에 백건우씨는 오버하지 않는 소리를 내려고, 소리를 아끼면서 연주하는 게 충분히 느껴지더군요. 일종의 억제미라고나 할까요.

▶백=베토벤.리스트는 청중을 향해 나갑니다. 그러나 쇼팽은 소리를 끌어들입니다. 그러니 과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한=옆에서 지켜본 백건우씨는 일상의 모습이 언제나 예술과 맞닿아 있더군요. 연주자가 단순하게 악보만 보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흔적.배경을 찾아가며 가장 근사치를 찾아가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 백건우씨는 타력.에너지가 굉장하다고 평가돼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쇼팽 음반으로 보자면 백건우씨에게 또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백=연주자들의 성향은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건강하고 우렁찬 소리로 음악에 접근하고 어떤 사람은 연약해 큰 형체를 못 보여주는 사람이 있죠. 좋은 연주자는 그 양면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그런 의미에서 백건우씨야말로 진정한 피아니스트라고 봅니다. 일생 동안 누구를 가르친 일도 없죠. 그것이 음악에 몰입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게다가 계속 매력있는 피아니스트로 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까닭은 많은 책을 탐독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주자는 자기 분야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 상상력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백=음악이란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죠. 인간이 곡을 쓰고, 인간이 연주하고, 인간이 그걸 듣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테크닉이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다룬다면 그것은 피아니스트일 뿐이지 음악인은 아닙니다. 음악의 힘이란 신비스럽습니다. 어떤 순간 연주하면서 내 자신을 잊게 되죠.

▶한=앞으로의 계획이 어떠십니까.

▶백=당장 프랑스로 돌아가면 바그너 등을 피아노로 편곡한 프로그램으로 독주회를 하기로 돼 있습니다. 길게 보자면 내가 이제껏 안 가본 나라, 안 가본 세계로 갈 작정입니다. 겉핥기 방식이 아니라 좀더 파보는 데 몰입하고 싶습니다. 음악이란 인간처럼 겹겹으로 되어 있는 것이잖아요. 인간도 마스크를 자꾸 벗겨가야 더 알아지는 것처럼요. 물론 그래도 끝까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정리=홍수현 기자<shinna@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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