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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6)-제85화|나의 친구 김영규(11)-이용상|느닷없는 입대 통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가미카제(신풍)특공대에 지원하겠다는 조건부로 내가 경기도 경찰부에서 풀러난 1943년말,경성(서울)거리는 군국 일색이었다. 거리마다 「성전을 승리로 이끌자」는 현수막이 나붙고 아침 저녁 전파 가게는 군대 행진곡으로 요란스러웠다.
다음해 정초부터 경기도 경찰부 마쓰하라(송원)형사는 위협적으로 나의 가미카제 특공대 지원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해 5월 용산에 있는 조선군 사령부에서 실시한 1, 2차 신체 검사에 합격한 나는 곧 일본 동경에 있는 다마가와(옥천)육군 비행학교에 가서 항공 적성검사를 받아야 했다.
내가 떠나는 서울역 광장에는 수 많은 학우들이 나와 교가를 부르면서 나를 전송해주었는데 그 광경은 누가 보아도 거북한 장면이 아닐 수 었없다.
민족 학교라는 진성 전문 학생이 일본을 위해 가미카제를 지원했다는 것 자체가 꼴 사나울 뿐 아니라 가미카제를 지원한 민족 반역자(필자)를 비웃거나 나무라지는 않고 열렬히 전송하고 있는 장면은 뜻 있는 조선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냉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떠나가는 내 마음은 쓰라렸다.
전송해 주는 저 많은 학우들 중에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 뿐이었으니….
동경에 간 나는 3일간의 적성 검사를 받았다. 최종 판정관은 나에게 「A합격」을 선언하면서『곧 입교 통지서가 갈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가미카제 입교 통지는 오지 않았고 대신 9월16일 나는 징병 입대 통지를 받았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1944년 2월 개성 출신 마쓰이(송정)라는 비행군조(비행군주=중 사)가 비루마 전선에서 단독 비행으로 인도양으로 탈출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 이후부터 한국인은 단 한 사람도 비행사로는 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정책적으로 마쓰이 비행사가 전사한 것으로 발표했고, 여류시인 노천명은 송정오장 영전에 바치는 『신이』이라는 시를 매일 신보에 발표했다.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알지도 못한 마쓰이라는 그 개성인이 나를 가미카제에 태우지 않고 지금 이렇게 중국 대륙으로 보내다니….
군용 열차는 봉천(심양)에 가까운 소가둔에서 방향을 서남쪽, 즉 중국 대륙쪽으로 틀더니 (심산철도) 다음날에는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에 들어섰다.
산해관은 「천하제일관」문이 있는 곳으로 만리장성 2천4백km중에서도 동쪽 끝이다.
천진·북경·낭자관까지는 광막한 평야였으나 대륙의 북쪽 끝인 산서성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험준한 산과 산의 연결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부터는 등화 관세를 철저히 하라고 야단법석이었다.
공습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 중국 게릴라의 기습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군이 이 지방을 점령한 것은 이미 6, 7년전인데 기습이 있다니…. 그렇다면 내가 조바심하고 있는 「그날(탈출)」도 의외로 빠를 수 있겠구나…납 이렇게 생각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후일 알게됐지만 이 일대는 중국군과 공동 작전을 펴고있는 조선 의용군의 무대였다.
며칠 후 깊은 밤 험준한 산 길을 달리던 군용열차가 커브를 막 돌고 나더니 별안간 『삐익』하고 급정차 했다. 우리들 앞에는 활활 타오르는 봉화가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에 불타고 있었다. 『중국군이다』고 모두 소리쳤다. 특히 대대장 오카모토(강본)대위는 안색이 달라지며 허둥댔다.
그때 군용열차에는 다음 역에서 내린다는 한 중국 소년이 타고 있었다(소년은 일본 군속). 그 소년이 말하기를 『저 봉화는 팔노군끼리 하는 신호 연락이다. 이 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아무 일 없다』면서 『팔노군이 공격할 의사라면 왜 봉화를 올리면서까지 자기들 위치를 밝히겠느냐』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대상 오카모토는 중국 소년에게 여러 가지 사항을 자세히 묻고 있었는데 소년과 오카모토 대위와의 대화는 모두 내가 통역했다.
역시 소년의 말대로 아무 일 없었다.
오카모토 대위는 나에게 『중국어를 어디에서 배웠는가』고 물었다. 나는 「일본놈들 꼴 보기 싫어 대륙으로 뛰려고 배웠다」고는 차마말할 수 없었고 『장래 대륙으로 진출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는 자기도 좁은 일본이 싫어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동경 「척식(척식)대학」에 다녔다는 것이다. 이날의 통역은 그 후 오카모토와 내가 끈끈한 관계를 맺게된 인연이었을 뿐 아니라 머지않아 우리 조선 병사들의 생사와도 연결되는 기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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