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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캐릭터사업 40억 원 날리고 '새치기'로 영화 입봉 대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무지갯빛 '광수생각'에 취해 돌고 돌다 더 단단해졌다

1. 만화 때문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렇게 그 무지개를 좇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만화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됐다. 평론가들의 "말도 안 되는" 악평과 안티 팬들의 '악플'이 그를 괴롭혔다.

2. "사업한답시고 한 40억 원 정도 날렸죠. 많이 힘들었어요…. 내가 왜 이 지경까지 몰렸을까.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벌어놓은 돈은 다 썼지,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지, 암담했죠."

3. 그저 여리기만 했던 마음에는 조금씩 굳은살이 박였다. 단단해지고 있다. 그는 "그러한 내가 더 좋다"고 한다. 잃었던 날개를, 아니 잠시 접혔던 날개를 펼쳐 다시 날아보겠다는 의지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4.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고요? 사랑은 100% 변해요. 변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게 아녜요. 다만 형태가 변할 뿐이죠. 그렇게 사랑의 형태가 변하는 것을 느껴가면서 상대방의 사랑을 깨워야죠."

프로필

박광수 누구인가?

1969년 출생

단국대 시각디자인과 졸업

일러스트레이터.디자이너로 활동

만화잡지 <페이퍼>에 <광수만가> 연재

1997년부터 3년 8개월간 <조선일보>에 <광수생각> 연재.

저서: <광수생각> 1.2.3, <광수 광수씨 광수놈><나쁜 광수생각><여자들이 모르는 남자들의 진짜 속마음 108문 108답><무지개를 쫓다 세상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치다><그때 나를 통과하는 바람이 내게 물었다. 아직도…그립니?>

돌풍의 <광수생각>의 만화가 박광수 씨는 잊혀졌다. 그런데 <광수생각>이 연극으로 돌아온단다. 그가 지난 몇 년간 겪었던 큰 굴곡과 근황,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궁금했다. <광수생각>으로 초 인기 절정을 구가했던 만화가 박광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왜 갑자기 박광수냐고? 뜬금없다고? 따져 묻는다면 그냥 선한 웃음밖에….

"얼마 전 첫눈이 왔고, 그날 우연히 대학로에서 연극 <광수생각>을 보게 되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이 정도다. 막과 막 사이를 이어 주는 만화 <광수생각>은 잊고 지냈던 기억을 새삼 떠오르게 만든다. 첫눈처럼 순수했다고 굳게 믿는 첫사랑, 첫 키스, 가끔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달구는 그 누군가, 아니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

1997년 IMF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 <광수생각>은 특유의 유머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꽃미남 연예인만큼의 '왕팬'들이 생겨났고, 신문 만화를 오려 암 투병 중인 어머니 병상 곁에 붙여놓는 중학생도 있었다. 부부싸움을 한 엄마, 아빠께 아들이 건네는 <광수생각>은 어떤 심판의 '옐로카드'보다 효과 만점이었다.

두루뭉술한 외모와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무장해제시킬 것 같은 넉넉한 웃음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던 박광수. 정상에 오르는 데 굳은살이 덜 박힌 탓일까? 이후 예비군훈련 불참, '새로 찾아든 사랑', 그리고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신문 지면에 오르내린 그는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갔다. 연예인야구단에서 맹활약하는 그의 소식이 간간이 들릴 뿐.

모처럼 그에게 연락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조금씩 아물어가는 상처를 다시 헤집어놓는 것은 아닌지…. 그럴 때마다 엄습하는 '기자질'에 대한 회의를 끌어안는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이미 그의 전화번호를 '꾹 꾹' 누르고 있다. 스위트 소로(Sweet Sorrow)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이라는 곡이 통화음으로 흘러나왔다. 한참 음악감상을 하고 나서야 "여보세요"라는 느릿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사랑, 야구!

왜 자기를 만나려는지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연극을 보다 '광수' 생각이 났다"고 하자 쑥스러운 듯 "아 ̄"라고 한다. 수화기 너머로 그 특유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꼭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주저 주저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더니….

12월13일, 꼭 눈이 올 것만 같은 수요일 밤에 그를 만났다. 서울 청담동 한정식집-. 6시에 만나기로 한 그로부터 5시 50분쯤 메시지가 왔다. '정말 죄송한데 15분쯤 늦을 것 같아요. 차가 막혀서요. ㅠ. ㅠ' 그가 제시간에 도착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마감시간, 약속시간 같은 것은 '맞아 죽어도' 잘 못 지키는 '광수'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략 35분쯤 지나 그가 어슬렁어슬렁 방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뿔테가 노란 뿔테로 바뀐 것 외에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쑥스러움과 약간의 긴장된 표정까지….

어색하고 냉랭한 분위기도 잠시-. 그의 전화가 울린다.

"어, 일단 와서 전화해."

연말이라 또 다른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누구 만나기로 하셨나 봐요?

"연예인야구팀 사람들요. 오늘은 '노인네'들끼리 모여 소주 한 잔 하기로 했어요. 야구팀 사람들과 많이 만나요. 친한 사람들은 거의 야구팀에 끌어들이니까. 시즌 중에는 일요일에 꼭 야구를 해요."

-이번에 MVP도 받으셨죠?

"네, 올해 제가 세 번이나 받았지 뭐예요. 연예인 올스타전, 리그 결승전, 그리고 저희끼리 뽑는 MVP까지. 출석률로 상을 주는 것 같아요."

-출석률과 실력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고요?(웃음)

"그건 아녜요. 노민영.전노민.김태균.정보석 형은 정말 잘해요. 현섭이랑 혁필이가 좀 못하고. 경호(가수 김경호)도 자기 말로는 야구선수 출신이라는데, 제가 경호 야구 하는 것 보고 '너 중학교 때까지 야구 좋아한 거지'라고 물어봤어요."(웃음)

야구팀 이야기로 봇물 터지듯 풀린 말문은 2차 전골집, 3차 포장마차까지 이어졌다. 비워내는 소주병 수에 비례해 이야기의 농도는 깊어졌다. 1차 '워밍업'에 들어갔다.

-연극 <광수생각> 재미있게 봤어요.

"어, 보셨어요? 저도 좋게 봤어요. 연출가께서 살을 잘 붙여주셨더라고요. 주인공이 제 실제 이름이라는 게 좀…."

-삽입된 만화는 직접 고르신 것이라면서요?

"제가 만화를 많이 골라 드렸는데, 두세 개 들어간 것 같아요. 그런데 뭐, 다 제 만화니까요."

극중 '광수'는 28세의 무명 만화가다. 겉으로는 활발하고 쾌활하지만 짝사랑하는 지현에게 고백도 하지 못할 정도로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 어느 국어 수업시간, 선생님이 광수에게 '퀴리부인' 전기를 소리 내서 읽으라고 시키는데, 혀가 짧은 광수는 '마리아 스콜로도프스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첫사랑인 지현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데….

"그게 다 실제 이야기예요. 제 혀가 약간 짧거든요. 의사/위사, 흰색/휜색…. 구별을 잘 못해요. 라디오 방송할 때도 비슷한 음들이 이어지면 굉장히 당혹스러워하죠. '마리아 스콜로도프스카….' 이게 퀴리 부인 전기인데, 그 장을 제가 통째로 외웠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고 하셨죠.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처음 누군가를 진지하게 좋아했던 것 같아요. 첫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기였지만…."

-그럼 진짜 첫사랑은 언제였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요. 화실에서 만난 한 살 많은 누나였어요. 그때부터 쭈 ̄욱이었죠."

#첫사랑, 그때 꽃을 줬다면…

-만화를 보면 유난히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애틋함이 많이 등장하죠?

"제 만화에서 사랑에 대한 대부분의 모티프는 대부분 그 누나에게서 나온 거예요. 쌍둥이 낳아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뜻, 바람결에 들었어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열과 성을 다해 좋아했지만, 그 누나는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누나가 대학입시에 실패했을 때는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했단다. 같은 학교에 들어가 잘해 볼 수 있겠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사랑이 이뤄지지 않으려고 했던지 그는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1년 후 운 좋게 그는 단국대에 합격했고, 드디어 그에게도 봄이 왔다.

누나를 만나기 위해 손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어느 건강한 남자와 함께 웃고 있는 누나를 보게 되었고, 냅다 뒤돌아 뛰었단다. 그러고 나서는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울었던 기억뿐.

-그때 누나에게 꽃을 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러게요. 지나고 보니 몇 번 이뤄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그 누나가 재수할 때였죠. 누나가 난로 옆에 앉아서 묻더라고요. '너 나 진짜 좋아하니?' 그때 제가 냉큼, '네!' 그래야 했는데 너무 놀라 '에이, 장난이지' 그러고 넘어갔어요. 그 다음부터 완전히 멀어졌죠."

그 후 우연히 대학로에서 만났지만 그때는 이미 각자 가정이 있는 몸이었다. "그때 난롯가에서 '네'라고 했다면 지금쯤 내 인생이 굉장히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 사랑이 이뤄졌다고 해도 여전히 예쁘고 아름답게 남았을까?

"글쎄…. 안 이뤄졌기 때문에 사랑이 예뻐 보이는 것일 수도 있죠. 아무도 모르는 거죠."

남자들은 첫사랑을 죽어도 못 잊는다더니, 실제 박광수도 그런가 보다. 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첫사랑 이야기는 그만 듣기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요즘 주로 어떤 작업을 하세요?

"글을 쓰고 있어요. 책 내는 준비를 하고 있죠. 원래 12월에 나올 계획이었는데, 5분의 1도 못 갔어요. 요즘 슬럼프예요. 글 쓰는 게 좀 귀찮네요."

-만화는 안 그리나요?

"진작 그만뒀어요. 최근 한 3년 반 정도 새로운 만화를 안 그렸죠. 광고만 그리고요. 돈은 벌어야 하니까요."

-광고가 돈이 되나봐요?

"그래요. 그동안 한 100군데 기업 광고를 했어요. 올해는 마이크로소프트사 덕분에 먹고살았고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하는 광고는 전 세계적 캠페인이어서 모두 똑같은 공룡인데, 우리나라만 제가 그린 공룡이에요. 우리나라는 파충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으니 이미지 좋은 만화가를 섭외하자고 해서 제가 공룡을 그리게 됐어요."

-'만화가 박광수'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당장은 '하자'는 데도 없고…. 누가 굉장히 좋은 제안을 하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만화를 그릴 생각이 없어요. 가끔 그럴 때는 있죠. 어떤 이슈가 있을 때, '이걸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 그럴 때는 내가 어떤 매체를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먼저 제안할 생각은 없네요."

#"나, 만화 그만 할래 ̄"

-'박광수표' 만화를 기다리는 팬이 많을 텐데요.

"…."

만화 때문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렇게 그 무지개를 좇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만화 때문에 상처를 얻었다. 평론가들의 "말도 안 되는" 악평과 '안티' 팬들의 '악플'에 그는 지쳐갔다.

"한 3년 반쯤 전이에요. 만화 하는 게 너무너무 지겨운 거예요. 와이프한테 말했죠. 나, 만화 그만 하고 싶다고. 제가 최근에 책을 냈을 때 어느 평론가가 '욕먹고 욕먹으면서도 계속해서 쓰고 그린다'는 글을 썼더라고요. 저는 유독 안티가 많은 만화 작가 중 하나예요. 심하죠. 다른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가 부지런히 놀리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눈동자가 허공을 맴돈다. 세상 이들의 평가와 질타, 채찍질에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저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것이 평론가라고 생각해요. 만화가에게 만화는 인생의 일부인데, '그 사람'들은 남의 인생을 너무 쉽게 논해요. 정확하게 알고 쓰는 사람도 거의 없고요. 처음에는 '네가 뭘 안다고 남의 만화를 평가하느냐'고 싸움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만화를 안 하니 그럴 일도 없어요."

그는 '베스킨라빈스' 같은 세상을 꿈꾼다. 제각각 다른 색깔과 맛을 가진 알록달록한 세상 말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나쁘고, 자기 잣대를 모든 이에게 들이대는 것은 잘못이란다.

그저 여리기만 했던 마음에 그 사이 조금씩 굳은살이 박였다. 단단해졌다. 그는 "그러한 내가 더 좋다"고 했다. 잃었던 날개를, 아니 잠시 접혔던 날개를 펼쳐 다시 날아보겠다는 의지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3년 반 정도 해왔어요. 요즘 그것을 계속 다듬고 있어요. 굉장히 오랜 꿈이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 하기 전부터 좋아했는데, 감히 내가 할 수 없는 장르라고 생각했던 거죠."

무엇이 그를 용기있게 했던 것일까.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일이었다면서.

"만화 그만두면서 와이프한테 물어봤어요. 우리 식구가 근근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어느 정도냐고 했더니 한 2년 정도는 괜찮겠다고…. 그래서 그 말 믿고 '2년 동안 나 하고 싶은 일 해도 되느냐'고 물어보고 시작한 거예요. 그게 벌써 3년 반이 됐네요."

벌어놓은 돈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와! 부럽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업 실패로 빚도 많았고, 한때 죽을 생각마저 할 만큼 상황이 안 좋았단다.

"(주)광수생각 차려 캐릭터사업 한답시고 다 날렸어요. 40억 원 정도 날려 먹었죠. 그 중에는 남의 돈도 있었고요. 많이 힘들었어요…. 내가 왜 이 지경까지 몰렸을까.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벌어놓은 돈은 다 썼지,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지, 암담했죠. 주차장에서 주차비가 없어 차를 못 꺼낸 적도 있어요. 차 속에서 엉엉 울었죠. 어찌어찌해서 빚 다 갚고, 이제는 그럭저럭 살아요."

한구석으로 미뤄뒀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서일까. 물 한 잔을 크게 들이켠 그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지금은 '산도리'(???)라는 캐릭터회사에서 고정급여를 조금씩 받으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 또 부지런히 영화 시나리오를 다듬고, 영화 DVD를 많이 본다. 캐스팅을 위해 연극도 열심히 보러 다닌다.

-최근 인상깊게 본 연극은 뭐예요?

"<광수생각>요."

#'영화감독 박광수', 비상을 꿈꾸며…

딱 정색을 하고 대답하더니 이내 씽긋, 하고 '광수표' 웃음을 내보인다. 초승달 같은 눈이 더 작아지면서 아래로 처지고 입 꼬리는 귓가에 걸려 상대방을 꼼짝없이 웃게 하는 원조 '살인미소'다.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어떤 내용이에요?

"사랑 이야기인데 계속 추리를 해야 하는, 반전이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아요. 원래는 라는 '하드 보일드'한 시나리오를 썼는데, 영화사에서 '입봉 감독이 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캐스팅할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나요?

"남자 배우로는 '폴 스미스' 안경을 쓴 이정재 씨를 염두에 두고 있어요. 여자 배우로는 손예진 씨와 김민선 씨가 좋을 것 같아요."

-영화는 언제쯤 볼 수 있나요?

"2007년 촬영에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영화라는 게 기다림의 작업이더라고요. 저는 '됐다' 싶은데 제작자.투자자의 입장도 있으니까요. 원래 2006년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은 마음을 좀 비웠어요. 어차피 늦어지는 거,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요."

하루는 영화판에 있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데 누가 말했다. 당신, 그거 아느냐고. 영화 한 편 찍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는지…. 자기들처럼 여기서 세월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만화가로 얻은 이름 가지고 '새치기'해 들어왔다"며 "치사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제가 그냥 전혀 이름 없는 사람이었다면 시간이 훨씬 더 길어졌겠죠. 그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했을 수 있을 것 같고. 제 성격이 굉장히 급하거든요. 제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성질 급한 사람일 거예요. 첫 번째가 우리 아버지고…."(웃음)

-그래요? 굉장히 느릿느릿한 것 같은데….

"얼마나 급한데요. 말하다 보면 뒷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그래요. 저는 사실 이런 음식문화도 못 견뎌요. 하나씩, 하나씩 나오는 거, 기다리는 거요."

그러잖아도 인터뷰 진행 속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아 답답하던 터였다. 그게 '광수' 성격 때문이리라 넘겨짚었는데, 아마 천천히 나오는 음식 때문이었나보다. 마침 그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이들의 전화가 계속 울려대던 차-. 함께 자리를 옮겼다.

2차는 근처에 있는 전골집-. 유명 탤런트.가수.매니저.사진작가가 미리 앉아 있었다. 술이 한 잔씩 돌기 시작했다. 누구도 술을 강요하지 않았다. 제각각 기호에 맞는 술을 열심히 마시는 분위기. 기분 좋게 서서히 취했다. 2차, 본 게임에 들어갔다.

"가장 편한 친구들"과 함께 둘러앉은 '광수'는 훨씬 여유있는 영혼이었다. 야구단 이야기로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했고, 어린아이들처럼 서로 '갈구기'도 했다. 하고픈 이야기 다 하고, 마음껏 웃어젖히고, 그 어떤 체면도, 꾸밈도 없다. 자연스럽게 '광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괴짜' 혹은 '기인'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과거로, 과거로-.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였죠?

"상태가 안 좋았죠. 대학교 때 동기들이 기억하는 저는 굉장히 희한하더라고요. '철가방' 같은 것을 들고다니면서 멜빵 바지 입고, 혼자 생각에 잠겨 돌아다녔대요."(웃음)

-공부는 못했을 것 같아요.

"네. 모든 게 공부라는 잣대로 구분되는 학교가 싫었어요. 그래서 공부 못하는 친구들에게 지극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만화를 그렸어요."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한 것은 언제였나요?

"고등학교 1학년 때요. 원래 순수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나온 둘째형이 '순수미술을 하면 배고프다'고 해서 그렇게 됐죠."

#"그녀는 내 운명…맞춤형 아내"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고 졸업을 못 했다고 하던데요?

"아…. 아녜요. 저 10년 만에 졸업했어요. 학점이 안 좋아 졸업을 못한 것은 아니고요. 전공필수 교수님과 사이가 안 좋아 계속 그 과목이 '빵구'가 났어요. 끝까지 안 통과시켜 주시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단국대 총장님이 방송에서 저를 보시고는 '박광수가 몇 년도 졸업생이냐' 하고 찾아보셨나 봐요. 그런데 졸업생 명부에 안 나오자 저한테 연락을 하셨어요. 밥 먹자고요. 그래서 졸업하게 됐죠."

당시 부모님께 "졸업 못한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졸업식 연출을 하기도 했다. 먼저 졸업해 취직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죄다 불러모으고, 조교에게 학사모를 빌려쓰고는 단과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도 찍고 밥도 먹었다. 영문을 모르는 부모님은 마냥 좋아하셨다고.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하셨던데….

"'방위' 마치고 바로 결혼했죠. 아마 부모님 입장에서는 저를 빨리 결혼시키면 철이 일찍 들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속도위반'은 아니었고요?

"아녜요. 첫 결혼은 그렇지 않았어요. 두 번째가 그랬죠. 원래는 이혼하고 나서 혼자 살려고 그랬어요. 제 스타일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틀려 남편으로 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람 좋아하고, 사랑보다 우정을 더 중시하고, 오지랖도 넓으니 남편으로는 낙제 감이죠. 그러던 중 지금 와이프가 '이 상황을 지속할 수는 없으니 선택하라'고 하더라고요."

고민을 많이 했다. 만약 훗날 결혼하게 된다면 지금 이 여자를 놓친 것을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위해 단 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아닐까'라고.

-또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하죠?

"하하하!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현재까지는 그래요. 지금도 농담처럼 제 마누라한테 그래요. 내가 비록 잠시 한눈을 팔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지막 사랑은 당신이라고요."

-시집간 친구들 보니 시간 지나면서 입이 슬슬 나오던데요?(웃음)

"집사람은 불만이 많을 거예요. 가정적이지도 않고, 매일 늦게 들어오고…. 저는 불만이 전혀 없어요. 맞춤형 와이프죠."

-이혼, 그리고 재혼으로 많은 것을 잃은 것 같던데….

"사실 이혼하면서 재기 못할 줄 알았어요. 재혼하면서는 이제 완전히 끝나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도 당시 생각은 '낚시터에서 라면 끓여주면서 사는 일이 있더라도 그게 더 행복하겠다'였어요. 제 책에 한 번 썼는데, 제 냄비가 작았던 것 같아요. 빨리 끓었죠. 지금은 다 먹고 찬장에 넣어뒀지만 그 냄비는 더 단단해지고 여유있어진 것 같아요. 예전보다 여러 가지 일에 대해 관대해지더라고요. 이런 게 관용인가요?(웃음) 그런 저를 발견하면서 더 좋은 모습으로 살겠다고 다짐해요."

세상 사람들에게 그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재혼한 남자'로 찍혔지만 '광수'는 정작 변한 것이 없다. 그의 화두는 여전히 가족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마음을 온전히 전할까 항상 고민한다.

"제가 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님이 연세 드시니 자그마한 것에 상처를 받으시더라고요. 우리 둘째형이 나보다 여덟 살 많은데, 엄마한테 '노인네 냄새가 난다'고 했대요. 그랬더니 그 뒤로는 우리만 보면 '엄마한테서 냄새 나느냐'고 물어보세요. 그래서 둘째형한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마음을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가 제 화두예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옥상에서 아버지 팔베개를 하고 별을 봤던 '광수'였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말썽을 부리면서 스스로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중간에는 치유가 안 될 정도로 거리가 많이 멀어졌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

"엄마를 만나면 안아 드리고 뽀뽀도 하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께는 그게 잘 안 돼요. 한 5년 전에 한번 뒤에서 안아드렸는데 아버지가 굉장히 깜짝 놀라셔서 제가 민망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모습들이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정말 좋으신 분이죠. 자수성가하신 사업가예요. 아버지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죠. 아주 유복하게. 그런데 당신이 자수성가한 분이라 자식들 게으른 것을 못 보셨어요. 초등학교 때 '샤프' 연필깎기가 처음 나왔는데, 그것을 사주면 자식이 게을러진다고 끝까지 안 사주셨어요. 연필깎기로 연필 깎아온 친구들이 부러워 저는 연필 깎는 칼로 기계가 깎은 것처럼 깎는 기술을 연마했어요. 연필깎기가 있는 척하려고요."(웃음)

결국 중학교 입학할 때 연필깎기를 사주셨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볼펜을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보'로 고이 남아있다. 그의 4형제는 요즘 보기 드문 가풍을 지키고 있다. 주말마다 부모님댁을 찾아 시간을 함께하는 것.

"저는 그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잘 안 모인다고 하데요. 야구 할 때는 좀 빠지기도 하는데, 지금은 비시즌이라 꼬박꼬박 가요. 모여도 별다른 것은 없어요. 각자 밥도 해먹고, 바둑도 두고, 텔레비전도 보고, 며느리들은 며느리들끼리 이야기하거나 농담을 하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소주병이 꽤 많이 비워졌다. 다음 코스는 야구 팀원이 운영하는 실내포장마차였다. 역삼동에 위치한 그곳에는 TV에서 본 낯익은 얼굴이 몇몇 더 보였다. 포장마차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고함을 치며 대화를 나눠야 했다. 3차, 막바지다. 힘내라, 힘!

-'광수'가 보는 '요즘 세상'은 어때요?

"매일 똑같은 것 같아요. 세상은 돌고 돌잖아요? 500년 전에도 어른들은 '요즘 애들 왜 이래' 했을 테고, 30년 전에도, 지금도 그렇고. 돌고 도는데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것 같아요. 인류 전체를 봐도 그렇고, 개개인을 봐도 그렇고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다들 후회하면서도 미리미리 잘 못하잖아요. 그런 실수를 안 하려고 노력하고 살아요. 그런데 전 인류가 반복해온 것인데 저 혼자만 거스를 수 있는 인물은 못 되는 것 같고…."

-최근의 가장 큰 실수는 뭐죠?

"이혼한 거요. 아이들한테 너무 미안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로 인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일…. 그리고 사소한 것이지만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 마누라 속을 썩이는 일요."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선택은 같은가요?

"지금 이 상황을 모두 알았다면 선택이 많이 달라졌겠죠. 어렸을 때 공부를 더 열심히 했을 것이고, 만화도 안 그렸을 것이고, 디자인만 했을 것 같고, 부모님 속도 안 썩였을 텐데…."

-만화를 안 했으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

"디자인 회사를 하고 있을 거예요. '디#'이라는 회사를 했었으니까요. '#'을 상호로 쓴 사람은 제가 처음일걸요? 제가 이혼하고,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페이퍼> 편집장인 경신 누나한테 전화해서 많이 울었어요. '왜 나한테 만화를 시켜 이런 일들이 있게 하느냐'고요. <조선일보>에 <광수생각>을 연재하면서 잘못을 많이 저질렀어요. 눈 앞에 너무 화려한 것들이 많이 펼쳐지니까 그걸 좇았던 거죠. 실제로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중에 <무지개를 쫓다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다>라는 사진집을 냈죠. 만화를 안 했다면 지금쯤 더 행복한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쁜 광수생각>을 보면서 '착한 광수'는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져요.

"그냥 '광수'였을 때도 똑같았어요. 착한 모습도, 나쁜 모습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하는 거죠. 그것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박광수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나쁜 광수생각>은 언론에 비친 제 나쁜 모습과 연결시켜 굉장히 나쁘게 보는 것이고요. 실상은 변하지 않았어요."

-<나쁜 광수생각>은 소재부터 틀리던데요? 섹스와 욕으로 도배돼 있던데요?

"맞아요. 이전에는 첫사랑과 아버지가 만화의 근간이었죠. 결국 심리 이야기였어요. <나쁜 광수생각>은 섹스와 욕으로 표현했지만, 그것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심리'였어요. <광수생각>과 <나쁜 광수생각>의 뿌리는 똑같아요."

-꼭 솔직하게 까발려야만 순수하다는 것인가요?

"사람들은 모두 진실하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조차 그 진실로 인해 얼마나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느냐에 관심이 있지, 실제 그 진실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우리 진실하게 대화해 볼까' 하는 사람들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고요."

-예전에 마광수 교수와 대담했을 때 했던 말 기억하세요? '까발리기'보다 '이해'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했잖아요?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조선일보>에서 했던 찬반 토론이었는데, 역할을 정해 줬으니까요. 저는 보수주의자, 교수님은 성해방론자…."

-말도 안 되는 역할극이었네요?

"아녜요. 저는 굉장히 보수적인 면도 있어요. 주사위 같은 사람이죠. 그렇게 착한 모습만 보여주면 굉장히 간단해요. 평소에 저는 그렇지 않죠. 솔직하게 다 보여줘요."

-사람들은 '착한 광수'가 가식이었던 것 아니냐고 하죠.

"주사위의 단면을 본 것뿐이에요. 제가 주사위 한 개 있는 면, 두 개 있는 면을 보여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이 선택해서 본 것뿐이에요. 보수적이기도 하고, 개방적이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하고…. 모두 광수예요."

-만화 중에 그런 내용이 기억이 남아요. '내가 지금과 같은 돈과 명예가 있어도 희정이(첫부인의 이름이다)와 결혼했을까'라는…. 결론은 '나는 평생 아내만 사랑할 것'이었거든요.

"남녀 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는 둘만 아는 것들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죠. 저는 다른 사람들이 이혼해도 외부에 알려진 것 외에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사랑해서 결혼했고, 사랑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단지 이혼함으로써 변질한 것인데, 이혼했다고 해서 당시 사랑했던 감정이 거짓은 아니라는 거죠. 저는 지금 와이프한테도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그게 내가 늙지 않고 사는 법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러면 마누라가 그러죠. '지랄하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이 더 이상 사랑에 빠질 수 없는 가슴이라면 죽은 사람이라고. 그는 "계속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듣다 보니 그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것은 또 아니었다.

"친구 같은 아버지 되고파"

"도덕적으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유부남이 다른 이성과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 어느 남자가 마누라 단 한 사람과만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비판받겠지만, 평생 바람 안 피우고 사는 남자, 제 앞에 데리고 와 보세요."

-여자도 그렇게 바람을 피우면….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단지 사회에서 용인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남자나 여자나 모두 똑같죠. 단지 그 여자가 내 와이프가 아니고, 여자는 그 남자가 내 남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죠."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깨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사실 할 말이 없죠. 특히 아이들한테요. 이혼할 때는 부모님, 형제들한테 미안했는데 이제 그렇지는 않거든요. 정말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이들이죠. 아이들이 아무런 결정권이 없을 때 엄마 아빠가 그렇게 결정해 버린 것이니까. 그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제가 평생 짊어져야 할 과제예요. 그것 외에는 제가 한 일에 후회 없어요. 충분히 오랫동안 고민한 문제였고, 둘만의 문제도 있었으니까."

-상준이.정인이는 '왔다 갔다' 하나요?

"그럼요. 아이들한테 항상 그렇게 이야기해요. 엄마랑 살고 싶으면 살고, 아빠랑 살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요. 지금 집사람도 언제든지 아이들을 받아주겠다고 하고요. 최소한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해주자고요."

-만화에 보면 아버지가 참 많이 등장하는데, 본인은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나요?

"그냥 편한 친구 같은 아버지요. 아들 같은 경우 중학교에 들어가면 술 마시는 예법을 가르쳐준다든지…. 저는 남자만 넷인 집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술.담배.도박 같은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저만 술 마셔요. 어렸을 때부터 화실 선생님께 술을 배웠어요. 그래서 술버릇도 없고 나름대로 주도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을 아버지한테 배웠으면 더 좋았을 것 같더라고요. 추억도 만들고, 그만큼 소통할 수 있잖아요. 저는 꼭 그렇게 해줄 거예요."

소주를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소주 광고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좋은 양주보다 소주가 입에 착착 달라붙는단다. "조만간 압구정동에 소주집을 하나 낼 것"이라는데 걱정이 앞선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그가 과연 '수지'를 잘 맞출 수 있을는지.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소주잔과 물컵을 나란히 세우고는 이런 말을 꺼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100% 변해요. 변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거든요. 어떤 여자가 그래요. 야, 너 처음에는 이랬는데(소주잔) 어떻게 저렇게(물컵) 변할 수 있어? 그럼 안 되지.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질량은 물컵일 때가 더 커진 거잖아요. 사랑의 형태가 변하는 것을 느껴가면서 상대방의 사랑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드는 예 하나-.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여자는 남자의 야구 하는 모습에 반했다고 했다. 그 둘이 결혼했다. 그러고 나서 일요일마다 야구를 하러 가는 남자를 보니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헤어질 때 여자가 말한다. "나는 네가 야구 하는 모습이 너무 싫어."

'광수'가 말한다. 사랑은 ' ̄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 ̄임에도' 참고 견디고 옆에 남아있어 주는 것이라고.

우정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우정은 '그 친구가 필요해서, 좋아서, 혹은 그 친구가 나를 좋아하고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 친구를 위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라고.

"사람 때문에 쓰러지지만 또 어떤 사람 때문에 일어서기도 하는 게 사람인 것 같아요. <나쁜 광수생각>에 '강호의 의리는 사라졌다'고 쓴 적이 있어요. 의리라는 게 있기는 있지만 옛날과 같은 의리는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아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진실에 의해 내가 얼마나 이익을 보는지, 손해를 보는지를 따지잖아요. 우정이 많이 변질됐죠. 나이 들고 팍팍해져 만난 이들한테 순백의 우정의 의미를 찾기는 힘든 것 같아요."

'착한 광수' '나쁜 광수'… '광수'의 진실

-이렇게 친구가 많은데요?

"진정한 우정을 찾아보려고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 같아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군요?

"굉장히 많이 타요. 누군가를 항상 찾으니까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뭔가요?

"소주 마시고 싶어요. 소주 마시는 데 '매진'하고 싶다고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세요.

"예쁘게 봐 주세요. 흐흐."

여기까지다. '오프 더 레코드' 이야기는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다. 착한 광수, 나쁜 광수 할 것 없이 그게 '광수'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는 바보이며, 그는 천재다. 그는 순수하기도 하며, 그는 속물이기도 하다. 그는 착한 사람이며, 그는 나쁜 사람이다. 그 모든 것이 다 박광수다.

이제 그만 내가 원하는 '광수'의 모습이 아닌, 인간 박광수를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가 더 행복했으면 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넉넉한 웃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에게 사인을 받았다. 친숙한 신뽀리가 잔뜩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아, 늘 건강하고 만날*2 신나고 즐겁고 똥두 잘 싸고 항상 행복하게 살어!"

독자들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독자 여러분, 늘 건강하고 만날 신나고 즐겁고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라요!"

월간중앙 임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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