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NOW] 취업난 속 학점 잘 받기 위한 '물밑 작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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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연세대 조모(22.경영학2)씨는 교양과목인 '리더십 사례연구'의 담당교수를 곧 찾아가기로 했다. 재수강을 한 데다 시험 없이 리포트로 대체하는 수업이라 학점이 걱정돼서다. 지난 학기 A학점을 받은 친구의 리포트와 자신의 리포트를 비교해가며 교수를 설득할 생각이다. 신입생 때부터 학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는 그는 "성적 문제로 교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망설이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기말시험을 마친 대학가에선 학점을 0.1점이라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의 '물밑 작업'이 한창이다. 취업문이 바늘구멍이 되면서 벌어진 풍경이다. 학점이 취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학점이 기대치보다 낮을 경우 e-메일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절차고, 담당 교수를 직접 찾아가 항의도 한다.

◆ 다양한 군상=교수를 설득하기 위한 유형은 다양하다. 우선 전통적인 방법으로 '애걸형'이 있다. "부모님이 실직해 장학금이 필요하다" "평점 3.0이 안 돼 취업이 힘들다"는 문구를 동원해가며 교수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한다.

교수를 띄워주는 '애교형'도 등장했다. 경희대 전병관(스포츠심리) 교수는 지난주 "학교 최고의 강의다. 인생 스승으로 삼고 싶다"는 내용의 원고지 10장 분량의 편지를 받았다. 수강 인원 100여 명 중 20~30명은 기말시험지 뒤에 "강의 너무 좋았습니다" "수업 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는 등의 '아부성 편지'가 포함돼 있었다. 전 교수는 "한 신입 여학생은 영화 예매권을 넣어 편지에 동봉하기도 했다"며 "사제지간의 정이라기보다 학생들의 '실리주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정색하고 교수에게 항의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는 '막무가내형'도 있다. 지방 S대 국문과 강사인 박모(30.여)씨는 며칠 전 기말고사를 앞두고 4학년 남학생으로부터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수업에 단 한 차례도 출석하지 않은 이 학생은 "취업했는데 F학점을 받으면 졸업을 못하니 시험문제를 가르쳐 달라"는 내용이었다. "왜 A학점을 정해진 인원수대로 다 채워주지 않느냐" "C를 줄 바에야 차라리 재수강이라도 하게 F학점을 달라"는 요구도 있다.

연세대 법학과 조교인 권경휘(28)씨는 "교수님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성적을 따지는 모습을 볼 때 세대차를 느낀다"며 "재임용 여부가 불확실한 강사의 경우 학생들의 강의평가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엄하게 대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학부모가 항의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서울 시내 한 사립대 기악과 1학년생의 학부모는 딸이 학기 말 '수강신청을 제대로 못해 출석부에 이름이 없는데도 수업을 들어 학점을 받을 수 없게 됐다'며 낙심하자 "출석부를 잘 챙겼으면 이런 일은 없었다"며 교수에게 직접 항의전화를 걸기도 했다.

◆ 골머리 앓는 교수들=교수들도 이런 학생들을 상대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학기 초 수업계획서에 '성적은 가능한 좋게 주되 성적 항의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는가 하면, 1점 단위로 세분화된 평가항목을 공개해 사전에 항의를 차단하기도 한다. 일부 교수는 성적 공고 마감 30분 전에 성적을 게시한 뒤 곧바로 해외로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숭실대 배영(정보사회학) 교수는 "심각해진 취업난에다 학생들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팽배해지면서 본인의 이익과 불이익에 대해 민감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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