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의 “신고식”(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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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선후배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신고식을 하려 했는데 말을 잘 듣지 않아 혼을 내주려 했어요.』
27일 오후 6시30분쯤 서울 용산경찰서 형사계.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앳된 얼굴의 서울 하계동 H여고 2년생 10명이 「신고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같은 학교 후배 10여명을 집단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부모들의 직업은 사업·상업 등으로 쓰여 있었지만 비교적 부유한 집 자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옷차림새였다.
이들중 일부는 고개를 푹숙인채 눈물을 보이며 잘못을 뉘우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우리가 뭐를 잘못해 이렇게 조사를 받느냐」는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당당하게 형사의 신문에 응했다.
『갓 들어온 신입생 애송이 10여명이 언니라 부르고 싶다고해 선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들의 폭행동기는 너무나 단순했다.
이들은 수업을 마친 25일 오후 7시쯤 1학년인 최모양(15)등 잘따르는 후배 10여명을 『도봉산에 놀러가자』며 꾀었다.
이들이 버스에서 내려 찾아간 곳은 어둠이 짙게 깔리고 으슥한 서울 우이동 4·19기념탑이었다.
『선후배신고식을 가질테니 한줄로 서.』
갑작스러운 선배의 명령에 후배들은 그냥 오순도순 얘기나 하다 집에 가자며 고분고분 따르려하지 않았다.
순간 선배들의 발과 주먹이 날았다.
『뭐 이따위 건방진 ×들이 있어. 진짜 선배 맛을 좀 볼래.』
얼굴과 허리등을 마구 맞은 최모양은 3주의 상처를 입었고 다른 1학년생들도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2학년 언니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순순히 믿고 따랐을 뿐이에요.』
「친절한 선배언니」로 예상했다는 최양은 아픈 몸을 뒤척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가장 순수해야할 여고시절의 선후배관계조차 「사랑과 이해」가 아닌 「폭력과 굴종」을 강요하는 세태로 변한 현실에 담당형사도 『학생이니 불구속으로 해야지』라고 말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김호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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