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놀사건도 잘 터졌다?(권영빈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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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의원 뇌물외유사건 잘 터졌다고들 했다. 권위주의 시절 여야 의원 가릴 것 없이 하릴없이 외국시찰 간답시고 유관단체나 기업의 돈긁어 모아 님도 보고 뽕도 땄던 나쁜 관행이 이제야말로 고쳐지고 지역구와 국민을 위한 선량으로 정신 차리고 일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좋아들 했다.
그러나 결말은 어떻게 지어졌나. 똑같은 관행에 젖어있는 1백여명의 의원님들은 그냥둔채 3명의 의원만이 마지못해 속죄양으로 끌려가 구속되고 때맞춰 터진 서울음대 입시부정으로 사건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의원님,우리 의원님! 우표값·전화료 모자란다고 한꺼번에 세비를 올려놓고는 뒷구멍으로 억대의 뇌물외유를 했다는 분노와 좌절감만을 남긴채­.
예체능계 입시부정사건 정말 잘 터졌다고들 했다. 돈으로 자식의 재능을 사고 명문대학 입학이 곧 자녀의 결혼조건이라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교육풍토가 차제에 고쳐지고 근원적인 교육개혁이 모색되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를 했다.
그러나 결말은 어떻게 지어졌나. 36명의 교수·강사·학부모가 구속·수배되고 예체능 실기고사는 대학자율에 맡긴다는 편의적 임시대책으로 끝나버렸다.
최고의 지성이 모인다는 서울대에 어찌 부정이 일어날 수 있고 시대의 양심으로 살아야할 대학교수가 어찌 몇푼의 돈에 팔려 지성과 양심을 팔 수 있느냐는 분노와 좌절감만을 남긴채­.
아득한 옛일같지만 불과 두달전인 1월22일부터 2월초까지 있었던 일이다.
2월4일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수서사건이 정경유착,정치와 검은 돈의 관계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수서사건 잘 터졌다고들 했다.
30년 개발독재의 관행속에서 길들여져 왔던 온갖 악폐가 이 사건을 계기로 시정되고 정화되기를 바라는 간곡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결말은 어떻게 지어졌나. 축소 수사는 결단코 안된다, 외압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빗발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걸프전 종식과 기초의회 선거분리 실시라는 발표와 함께 수서사건은 물건너 가버렸다.
6공정권에 대한 깊은 의혹과 정치와 기업인에 대한 불신과 분노만을 남긴채,5명의 국회의원,1명의 비서관,1명의 국장이 구속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나버린 것이다.
페놀사건,이거야말로 잘 터졌다고들 했다.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가파른 세월속에서 정부와 기업과 우리 자신들이 방치하고 훼손했던 환경파괴의 실체가 인과응보로 우리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식수가 되었다는 깊은 반성과 근원적인 해결책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페놀사건 잘 터졌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 결말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검찰은 발 빠르게 페놀유출업체가 두산전자임을 밝히고 회사간부와 말단공무원 7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다시금 「맑은 물 공급종합대책」에 전력할 것임을 약속했고 앞으로 폐수방출기업주에겐 구속 체벌을 강화하며 1천7백명의 환경감시원을 증원하겠다고 대책을 밝혔다.
누구나 말할 것이다. 어찌 낙동강만이,어찌 페놀만이,어찌 두산전자만이 문제겠는가. 89년 한강상수원이 중금속으로 오염되었다고 했을때 정부는 3조5천억원을 들여 물 하나는 끝내주겠다고 다짐했지만 환경처 예산은 지난해보다도 1백억원이 깎여있다. 믿어 보아도 별 볼일 없더라는 체념밖에 남는게 없을 것이다.
근원적 대책없이 기업주를 구속하고 감시반원만을 늘리는 사법적 대응만으로 맑은 물 맑은 공기가 저절로 확보되리란 보장이 있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기업주들은 말할 것이다. 자금없고 공해방지 기술마저 낙후된 오늘의 형편에서 감시와 체벌만을 강화한다면,단속반원에게 주는 뒷돈이 월1회 10만원에서 월2회 1백만원으로 늘어날 뿐이라고 푸념할 것이다.
이제 다시 며칠후면 또 끔찍한 사건이 터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언제 강이 썩었고 언제 페놀식수를 마셨냐는듯 모두가 망각속에서 새롭게 터진 사건에 새롭게 분노하고 좌절하며 정부는 때맞춰 몇명의 고위 공무원 목을 날리며 또다른 사건이 여론의 방향을 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일찌기 선현은 가르쳤다. 인간에겐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아는 지혜(생이지지)가 있고 공부해서 깨우치는 지혜(학이지지)가 있으며 어려움을 겪고서야 체득하는 지혜(곤이지지)가 있다고 했다.
지난 3개월간 경천동지의 어려운 사건들을 연거푸 겪으면서 우리 스스로 체득한 지혜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30년간의 권위주의 체제와 개발독재가 몰고왔던 그릇된 관행과 악폐와 부산물이 모습을 바꾸면서 여러사건으로 터져나왔지만 정부와 국민 모두가 일과성 대책,일과성 분노로 대처하고 그냥 넘어가고 잊어버리는게 아닌가.
권위와 압제의 시절을 청산하고 시민주도의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민주화 과정의 한 복판에서 어려운 고비를 넘길때마다 어제의 잘못을 고치고 내일을 기약하는 근원적 대책을 이성과 중지로 모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그런데도 사건이 터질때마다 누구 목이 날아갈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OB맥주를 마시느냐 안마시느냐로 서로 멱살을 잡는 지엽말단에 매달리다보면,책임자의 목만치면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손을 터는 정부의 안이한 자세를 부채질할 뿐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사건이었다 해도 지난 3개월동안 우리에게 제기된 문제는 맑은 정치,밝은 사회속에서 맑은 물을 마셔야 한다는 우리 삶의 본질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어려움을 겪고서도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근원적 지혜를 우리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다면,보다 큰 어려움과 시련이 닥친다 한들 어찌 분노하고 불평할 자격이 우리에게 남아 있겠는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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