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한국 경제의 시계는 몇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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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국 경제에 직언을 서슴지 않는 오마에 겐이치 미 UCLA 객원교수는 지난달 서울에 와 "한국은 5년 동안 달라진 게 없다"고 침을 놓았다. 외환위기는 극복했지만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한국 경제의 근본 문제점은 거의 해결되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동안의 구조조정은 부실채권 처리와 기업부채비율 축소가 고작이었다. 공적자금으로 금융기관의 건전성은 향상됐지만 시장원리에 의한 금융 정상화는 갈 길이 멀다. 경영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강화됐지만 분식회계와 뭉칫돈 비자금의 악취는 지금도 온나라를 진동시킨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놓고 노사갈등은 심화하고 정부부문 개혁은 민간부문 개혁보다 도리어 뒤처진 상태다.

개혁의 시계가 멈춰서면서 성장엔진도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티트 마이어 전 독일 중앙은행 총재는 "노동시장을 개혁하지 못하면 한국도 독일처럼 저성장 수렁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의 향후 성장 예측치는 연 3~4%선으로 주요 경쟁국 가운데 꼴찌다. 더구나 우리의 산업공동화는 기술로 안 되니 원가라도 낮추어 보자는 측면이 강해 인재 유출과 지식공동화 양상마저 띠고 있다.

그럼에도 참여정부는 부정부패의 개혁을 강조만 할 뿐 시계를 앞으로 가게 할 중장기 비전은 지금도 안개 속이다. 일인당 소득 2만달러는 성장의 결과물일 뿐 그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다. 동북아 허브를 외쳐대면서 자유무역협정(FTA) 하나 제대로 맺은 나라가 없다.

FTA는 가장 조건이 쉬운 상대부터 협정을 맺어 자유무역을 실현시키고 이를 점차 확대시켜 궁극적으로 세계무역 자유화로 가는 긴 장정이다. 말이 자유무역이지 이 과정에서 '열린 지역주의'가 작동하고 여기에 못 끼면 세계무역에서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다. 가장 쉬운 상대인 칠레와 FTA를 못 맺는다면 중국이나 일본.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의 FTA는 훨씬 더 어려워진다. 농업 보완대책과 함께 비준을 서둘러야 한다. 비준을 더 이상 지연시킬 경우 한국의 국내 이해조정 능력은 국제적으로 의심을 받는다. 이는 정책의 대외신뢰에 치명적이다.

그러잖아도 세계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최근 매킨지 한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세계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인도네시아 59%, 말레이시아 51%, 인도 49%, 베트남 47%인 데 비해 한국은 27%에 불과하다. 세계화는 좋든 싫든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시장개방의 내용과 속도를 주체적으로 조절하면서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 경제의 문제가 소비.투자의 침체에 따른 단기적인 경기부진 때문이라면 무슨 걱정이랴. 생산.기술개발.금융.기업경영.노동.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수출이 호조라지만 품목과 지역의 편중이 심하다. 메모리칩이 세계 1위지만 반도체는 가격 변동폭이 커 수익성이 불안정하고, 휴대전화 왕국인데도 정작 핵심기술은 못 갖고 있다. 고기술 핵심부품의 해외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간다. 한마디로 내일에 대한 확신을 못 갖는 상황이다.

틈새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우리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산업 기업모델 창출 등 '강소국'특화전략이 절실하다. 개혁은 목표설정 못지않게 재원과 수단의 한계로 목표간 충돌이 빚어질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분명한 밑그림이 중요하다. 거기에다 현실적 제약을 국민에게 설득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이 둘이 없으면 한국 경제의 시계는 거꾸로 가거나 계속 헛돌 수밖에 없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