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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일호 사극·멜러물서 "우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세월이 횰러 어느덧 원로감독 소리를 듣는 장일호(1926년생)는 이번 대종상에서 예비심사(30명)의원장을 했다.
『의적 일지매』(61년)를 시작으로 약70편을 연출하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아 제3부』(84년)를 만들고 나서는 위 3분의2를 잘라내는 위암수술을 받고 훌륭히 회복, 지금은 얼굴색이 아주 좋다.
그의 작품은 오락사극·멜러드라마가 많은데 홍행계에서 입김이 센 지방 흥행사들이 뽑는 한국의 홍행감독 제1위에 투표로 뽑힌 적이 있다. 홍콩 쇼프러더스에 가서는 같이 전속 계약된 일본인 감독과 같은 액수의 연출료를 받은 적도 있다. 대만에서는 한국영화의 흥행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당초 해방직후 극단 신협 배우로 출발했다. 지금도 한달에 한번씩 있는 신협의 신·구 멤버모임에는 가급적 참석한다. 영화쪽보다 연극쪽에 더 정감이 가는 것일까.
신협시대에는 유치진·박진·이해랑·김동원 등이 스승이자 선배였다. 문정숙과 살던 그의 형 장일은 일제때부터 황철이 하던 극단 아낭의 멤버였다. 황철은 문정숙의 언니·문정복(북한 인민배우)과 살고 있었다. 그래서 황철은 형과 동서간이기 도하여 마음속으로 가까운 편이었다. 종로 수표동에 살 때 대문을 막 나서자 황철이 오고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그의 손을 꼭 쥐고 『장군, 열심히 하게』했다. 다음날 황철이 이북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해방직후 좌·우익으로 갈라져 으르렁거릴 때 황철·심영·안막 등은 연극동맹 소속이었 다. 함세덕 극본 『태백산맥』이 국도극장에서 공연될 때쯤이 그들의 전성기가 될까. 이때는 하이틴이었던 필자도 구경갔었다.
황철은 소속이 좌익쪽이었지만 사상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이쪽 신협의 전신인 극협쪽에도 자주 놀러왔었다.
효과로 유명한 이상만은 황철·심영등은 집도 잘살고 사상도 좌익이 아니어서 이쪽에 남아 있었더라면 예술원회원뜸 되어 해외나들이나 하면서 편안한 인생을 보낼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필자에게 한적이 있다.
강일호도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심영은 조금 저쪽 사상이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기억한다.
이해랑 같은 사람은 황철이 이북으로 가는 것을 말리지 못하고 그대로 보낸 것을 두고두고 애석해하고는 했었다. 만년의 이해랑은 큰 존재였지만 그당시의 이해랑은 황철을 만류할만큼 크지는 못했었기 때문이다.
황철이 주연하는 극단아낭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무대를 4O년대초 필자가 중학2년때쯤 해주극장에서 본적이 있다. 이때는 국민극이라하여 일본말로 하는 단막극을 하고 나서 진짜 연극을 했었다. 그당시 황금빛 찬란한 고구려 무사들의 의상·소도구들은 전혀 상상을 초월한 경이였다. 역사를 목격하는 감동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감동이 최남선의 『고사통』, 이광수의 『흙』 『단종충사』등을 탐독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일호는 8년간 신협배우로 있는 동안 누가 하래서 한 것도 아니지만 틈틈이 연출공부를 했다. 풍문여고 연극반을 지도해 『견우직녀』로 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 대학연극콩쿠르에서는 중앙대 연극부를 지도해 유치진작 『조국』으로 단체상을 받았다. 이때쯤 연출에 자신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상옥이 찾아와 자기의 조감독을 하라는 소리는 못하고 배우들의 연기지도를 해달라고 했다.
같은 신협멤버였던 최은희가 장일호를 잡으라는 등 무슨 말을 했던 모양이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 』(58년),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59년)등을 거들기 시작해 임희재각본 『성춘향』(61년)까지 도왔다. 그랬더니 신상옥이 보답하는 뜻에서 『의적 일지매』를 하라고 해 감독으로 데뷔한다.
그리고 나서는 『원술랑』(61년),『원효대사』(62년),『흑두건』(62년),『화랑도』(62년),『불한당』(63년) 등 사극을 만들어 거의다 12만명에서 16만명이 드는 흥행의 호조를 보인다. 그런 뒤 『석가모니』(64년)가 38만명이 들어 기염을 토하고 흥행감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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