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군 고문 사」아직도 생생|불의는 대가 치르는 법|당시 "고문" 증언의 오인상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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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5공 세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박종철 군 고문 치사사건이 발생한지도 벌써4년이 넘었다.
당시 박 군의 사인이 재빨리「고문치사」로 확인된 것은 당국의 은폐 기도와 온갖 압력을 이겨내고『고문 흔적이 있었다』는 단정적 증언을 했던 한 젊은 의사의 용기와 결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중앙대 의대 조교수 겸 내과의사인 오인상씨(35).
그는 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박 군의 실신한 몸에 인공호흡을 하다 여의치 않자 사망진단서에「사인미상」으로 기재, 가장 먼저 박 군의 시신을 검시했던 의사다.
그는 이틀 뒤인 16일 몰려든 기자들에게 주저 없이 고문 흔적을 밝혀 놀라게 했었다.
역사의 물줄기를 민주화 쪽으로 돌려놓는데 한몫을 했던 그는 당시와 마찬가지로 병원과 강의실을 오가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지내고 있었다.
-「증언」이후의 생활이 거의 소개되지 않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일 오전8시에 병원에 출근해 진료와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당뇨병 교실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성인병 예방과 치료방법을 설명해 주는 일도 주요 일과의 하나지요.
-어려운 시기에 결정적인 증언을 했는데 신변에 불이익은 없었는지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 군에게 심폐 소생 술을 시도하다 실패로 돌아간 것이 1월14일의 일이었지요.
다음날인 15일 중앙일보에서 처음 사건을 보도했고 16일 출근도 하기 전에 기자들이 몰려왔어요.『고문의 흔적이 있었다』고 얘기한 후 사건이 점점 확대되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제가 일하는 병원의 회선이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전화 내용은 격려·협박·항의 등 실로 다양해 교환원들이 곤욕을 치렀습니다. 부모님과 아내도 수없이 많은 전화를 받고 제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있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 소견결과는 확실한 것이었고, 박 군을 살리기 위해 그 순간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는 하늘이 알아서 하신 일입니다.
-박 군의 직접사인이 물 고문이 아닌 전기고문이라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년 전 당시에도 똑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살아날지도 모르는 젊은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지, 사인을 규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박 군의 상태를 자세히 보지는 않았고 심폐 소생 술에 만 열중했습니다.
-『책상을「탁」치니까「억」하고 죽었다』는 수사발표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았는지요.
▲환자를 죽이는 병균에 일일이 분노할 수 없듯이 그같은 일에 분노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부도덕성이라는 병균은 국민을 죽이는 대신 고문과 허위의 당사자들을 죽인 것이 아닙니까.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주역으로서 갖는 현재의 감회는 어 떠 한지요.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정돼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말하자면 내가 우연히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거대한 계획 속에 내 역할도 예정돼 있었다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박군 가족과는 가끔 만나고 있습니까.
▲87년 12월 KNCC 인권 상을 수상하면서 시상식장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두 차례 마주친 일이 있습니다. 특별히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씨의 표정에서는 역사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대한 고비에 서서 가져야 했던 무거운 고뇌와 번 민의 그림자, 결단을 내리고 난 뒤의 충족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글=양선희 기자·시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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