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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원장 "잘해야 본전"…「방송 시어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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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방송을 얘기하다 보면 곧잘 등장하는 게 방송위원회다. 갈수록 커지는 방송의 영향력만큼이나 6공들어 방송위 수장으로서의 방송위원장은 알게 모르게 더욱 세인의 관심을 끄는 자리가 됐다.
방송위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근 거취를 분명히 한 강원룡 위원장의 사퇴는 기실 방송위와 위원장의 실체를 보여주는 계기가 된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방송위가 방송전반에 관한 최고 정책기구이고 위원장은 그 책임자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정부·학계·방송현업 제작자들 사이에서 공정성과 공공성을 내세워 꾸준히 나름대로 운신의 폭을 넓히려 했으나 번번이 벽에 부닥친 게 저간의 실상이다.
더구나 얼마 전 TV드라마 등 일부 프로그램에 대한 방송위의 제재조치가 외압에서 비롯됐다는 의혹과 맞물려 방송사 안팎이 시끌시끌해지며 방송위의 입지가 흔들렸던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이후의 방송위 인선·감사원 감사·예산승인 등을 둘러싼 정부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 끝에 빚어진 강 위원장의「일방퇴진」선언으로 방송위는 88년 출범이후 큰 위기를 맞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위원장이 위원 9명중의 하나로 위원들의 호선에 의해 선출되는 형식을 띠고 있으나 외부적으론 위원장 목소리의 높고 낮음이 방송위 활동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방송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방송 위원장의 역할이 그만큼 커졌 다는 얘기다.
반면 점차 늘어나는 권한 못지 않게 방송위와 위원장을 겨냥한 견제와 불만의 소리도 만만찮다.

<타율심의 못 마땅>
정부 주무부처인 공보처는 공보처대로 방송위의 독주현상을 그냥 놓아둘 수는 없다는 입장이고 현업 종사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방송위를 곱게 보지만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방송인들은 5공 시절과는 다른 방송위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방송 보호노력을 인정하면서도 방송위의 타율심의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방송위나 위원장이 종종「방송인들의 보호자」라는 시각과「말많은 시어머니」로 엇갈려 비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렇듯 걸리는 데가 많아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는 방송 위원장이 출현한 것은 10년 전.
81년 3월 모양새를 갖춘 방송위가 탄생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당시 방송위와 88년 8월 재 탄생한 현재의 방송위는 뿌리가 다르다는 점이다.
지금 방송위는 민주화 바람을 타고 새롭게 만들어진 방송법에 기초한 것이고 예전 방송위는 말많은 언론 기본법을 토대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60년대 초부터 민간방송사 사장 급으로 구성된 방송윤리 위원회가 존재했으나 운영자체가 자율심의기구로 본격적인 방송위원회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든 5공 시절의 방송위는 임기3년의 위원 9명으로 짜여져 결정권 없는 방송내용 심의에 그침으로써 임명과 업무수행 과정에서「큰 문제가 없었다」(?)는 뒷 얘기를 들을 정도다.
자연히 방송위나 위원장 모두 당시 언론 통폐합 이후의 공영방송체제 명분에 맞게 정부가 노린 별도의 관리·감독기구로서의「얼굴마담」에 불과했다는 혹평도 없지 않다.
따지고 보면 전체적인 분위기 상 어쩔 수 없는 운영이었다고 보는 측도 있으며 어느 한쪽에 쓸린 시각은 자칫 본인들의 명예를 해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위원장은 형식상 입법·사법·행정 등 3부의 추천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 9∼12명이 모여 호선으로 정해 왔다.
그러나 위원들의 의견을 조정하는 것으로 위원장 선출이 끝나는 듯이 보이는 이면에는 정부의 사전내정이 있다는 게 주변의 시각이다.
청와대 비서실의 정무수석과 주무부처인 공보처의 내부협의를 거쳐 정한 인물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의 낙점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정세로 돼 있다.

<5공 땐 얼굴 마담>
법률적 토대의 차이를 떠나 역대 방송 위원장은 모두 4명.
초대 위원장에는 새싹 회 회장이자 아동 문학가인 윤석중 씨가 방송위 설립 이전의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것이 인연이 돼 선출됐다.
양쪽 체제가 비슷하고 심의기능의 방송위 성격과도 맞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측면이 고려됐다는 것이다.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간 윤 위원장의 후임으로는 전 감사원장 정희택 씨가 자연스럽게 들어선 것으로 전해진다.
86년 4월 정 위원장이 임기를 1년 가량 남겨 놓고 현재의 언론중재위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공석이 된 위원장직은 위원들 중 한 사람인 고병익 한림대 교수가 이어받았다.
고 위원장은 3대 위원장으로 잔여임기를 채운 뒤 내친김에 4대 자리까지 연이어 맡았으나 언 기법이 폐지되며 단명으로 4대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언 기법 시절 이들 위원장 세 명의 공통점은 실무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위원장직이 비상임이었던 것과 무관치 않았다.
비 상근이라 월급은 없었고 위원장이라는 지위 상 승용차와 약간의 판공비를 대주는 선의 예우가 있었을 뿐이었다.
시대가 바뀌며 87년 10월 새 방송법이 제정된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위원장을 뽑는 위원수가 12명으로 늘었고 위원장도 상근직으로 조정된 외견상 변화뿐만이 아니었다.
방송내용 심의차원을 넘어 법적 강제력을 가진 심의·결정권이 주어졌고 위원회 구성에 있어서도 미리 내정된 위원장의 역량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졌다.
바꿔 말해 6공의 방송위는 강원룡 위원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됐다.
예전의 일방통행 식 관행을 깨고 강 위원장은「일할 수 있는 여건조성」을 조건으로 달았고 정부와의 막후 협상을 통해 위원회 구성을 앞두고 위원장으로서의 권한행사를 위한 일정지분을 요구, 긍정적인 반응을 받아 냈다.
자리다툼이나 힘 겨루기가 아니라 영국 프로그램 심의위인 방송기준위원회 구성을 본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강 위원장의 활발한 움직임에 힘입어 방송위의 입지가 강화되기 시작했고 이와 비례해 정부와의 삐걱거림이 잦아졌다.
61년부터 66년까지 초창기 방송윤리 위 위원장을 지낸바 있는 강 위원장의「방송의 제자리 찾기」노력이 공보처와의 방송정책과 맞물리며 서로 불편한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공보처로서는 강 위원장의 활동반경이 방송프로그램의 심의에 머무르기를 내심 바라는 입장이었고 정책기능은 정부기관인 공보처가 의당 맡아야겠다는 자세를 줄곧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양쪽의 껄끄러운 사이는 지난해 7월 국회의 방송법 날치기통과를 전후로 한층 골 깊은 관계로 번져 갔다.
단순한 프로그램 심의 쪽으로 방송위의 기능을 몰고 가려 했다며 방송위에서 크게 반발하고 나섰고 강 위원장과 최병렬 당시 공보처장관(현 노동부 장관)과의 담판 끝에 방송위의 정책기능이 대부분 살아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성 확보 숙제>
방송법이 바뀌며 위원 수는 다시 9명으로 줄었고 강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방송위 2기 출범과 함께 위원장으로 재 신임을 받았다.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공보처와의 역할분담을 확실히 한 것으로 본 그는 새롭게 의욕을 보였으나 끝내 고질적인 정부와의 갈등을 풀지 못한 채 물러앉았다.
감사원의 방송위 업무에 관한 이례적인 특별감사, 공익자금으로 충당되는 방송위의 예산 중 상당액을 공보처가 삭감하거나 예비비로 돌리는 등 최근 일련의 정부측 움직임이 강 위원장을 궁지로 몰고 갔다는 분석이다.
방송위는 헌법재판소·선관위와 함께 정부 내 독립기관으로 손꼽히는 세 곳 중의 하나다.
89년 동해시 보궐선거의 타락상에 책임을 느끼고 사퇴한 이회창 중앙선관위 위원장(현 대법관)에 이어 법적 토대 위에 세워진 독립기관장으로는 두 번째인 강 위원장의 사퇴는 다소 다르다.
그러나『원칙과 소신이 뚜렷하고 나름의 고집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강 위원장의 방송위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노력은 대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던 듯하다.
어쨌든 지금 방송위는 한국만의 독특한 기구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권의 편의대로 운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앞으로 방송위는 프로그램의 질을 높여는 차원에서 방송관련 정책개발에 힘쓰고 대신 민간 전문인으로 구성된 준 정부 기구가 인·허가업무를 담당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학계전문가들의 견해도 나오고 있다. <김기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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