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군지 알아야 찍지/유승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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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초의회선거일이 어느덧 불과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무관심속에 치러진다하지만 이쯤 되면 적어도 입후보자들만은 달아 오를 만도 한데 어쩐일인지 필자가 사는 아파트 동네는 이럴수가 있는가 싶게 아직도 「적막강산」이다.
특별한 경우인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도 선거공보는 물론이고 입후보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돌릴 수 있는 소형인쇄물 조차 골고루 받지 못했다. 단 한사람의 소형인쇄물을 얻었는데 그것도 아파트경비실입구에 흔한 상품광고지처럼 한가롭게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집어든 것이다. 분명히 입후보자는 4명인데 어쩐 일일까.
하기는 소형인쇄물이란 것도 규격이 법으로 엄격히 제한된 것이어서 보나마나한 것이었다. 한 면에는 꽉찬 얼굴사진,뒷면에는 간단한 공약들과 학력·경력을 열거해 놓은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공약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판단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겨우 약력에서 어렴풋이나마 그 후보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느닷없이 확성기소리가 창문을 때리기에 합동연설회구나 싶어 마음 먹고 집을 나섰다. 기다리기만 할게 아니라 스스로 알 수 있는데까지 알아보아야 한다는 책임감 반,과연 이번 지자제의 모습이 어떤가 하는걸 직접 체험하고픈 호기심 반이었다.
그러나 우선 장소조차 알기 어려웠다. 아무도 알려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무작정 소리를 따라 접근해 갔더니 다행히도 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의 합동연설회장에 이르렀다. 입구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한 젊은이가 다가왔다. 『저의 아버지가 출마했어요. 연설 잘좀 들어주세요』라고 그는 말했다. 아버지를 도와 나선 아들의 모습이 나쁘지 않아 그것만으로도 잘 왔다 싶었다.
그러나 정작 연설들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청중도 2백명안쪽이었고 그나마 입후보자의 가족과 운동원들이 거의 대부분인데다 무엇보다도 연설의 모습이 기성 정치인들의 그것을 꼭 닮아 있었다. 그것도 세련된 맛이 없어서 골목길을 포장하겠다는 식의 내용을 말하면서도 공연히 목청을 돋우고 손을 흔들어대서 운동원들의 웃음마저 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의 공약을 거침없이 쏟아놓는 후보자도 있었다. 이를 테면 자신이 당선되면 주거지와 녹지에 묶여있는 지역을 모두 상업지로 바꿔 놓겠다는 것이었다. 해당 지역주민에겐 솔깃한 소리일지는 몰라도 내가 듣기에는 큰일날 소리였다.
가뜩이나 주거지와 녹지가 부족한 형편에 그것을 상업지로 돌리겠다니…. 이것은 선거민 모두가 잘새겨 판단해야할 문제이겠으나 그 공약내용은 소형인쇄물에는 없었고 연설회장에 모인 사람은 극소수였으니 거의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알지도 못하고 표를 찍을 판이었다.
대부분의 도시사람들이 무관심한 선거지만 실은 이렇게 큰일이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래도 좋은 것인가.
필자가 선거일이 공고된 직후 한 택시기사에게 이번 선거에 대한 그의 기대를 물었더니 이런 답변을 했다. 『지자제선거요? 그거 서울에서도 하는 겁니까?』 지방자치제니까 당연히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하는 선거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거 말은 되네 싶었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30년만의 선거를 치르면서도 그것을 왜하며 그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아는 유권자가 과연 몇 %나 될까.
이는 결국 지난 세월을 하느냐 안하느냐로 허비해 놓고는 막상 정치적 필요가 생기자 벼락같이 선거일을 정한 정부탓이다. 이미 눈앞의 기초의회선거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게 되어있다. 그러나 다가오는 광역의회선거마저 이래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식이어서는 지자제의 긍정적 효과보다는 그 부정적 영향이 도드라져 국민의 정치적 불신을 더욱더 심화시킬 것이며 그것은 결국 현 집권층에 대한 불만으로 귀착될 것이다. 여권 성향의 후보자가 압도적이라고 좋아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투표가 끝나 당선자가 가려지면 문제점들은 더 확실히 드러나겠지만 지금까지의 사정만으로도 문제점들을 가려내기 어렵지 않다.
우선 지자제의 의미에서부터 그 기능과 효과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사항들이 국민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설명되고 홍보되어야 한다. 후보로나선 사람도,찍은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선거의 결과가 국민의 뜻을 정확히 반영한 것일수는 없을 것이다
나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아무런 제한없이 나올 수 있고 나온 사람이면 돈과 조직의 제약없이 자신의 됨됨이와 뜻을 알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다. 간단히 말해 선거공영제를 과감히 확대해야 하는 것이다.
입후보자와 유권자간의 실질적인 접촉의 기회도 앞으론 가능한한 늘려야 한다.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찍을게 아닌가. 입후보자들이 유권자들과 한자리에 모여 침을 튀기며 입씨름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한다. 그래서 선거에서 신명도 좀 났으면 좋겠다. 꼭 막걸리잔치를 벌여야 신명이 나는건 아닐게다. 유권자들이 입후보자들에게 따져들고 몰아세우기도 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바로 신명나는 일일 것이다.
가장 잘 알아야할 사람을 가장 잘 모르고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을 가장 심드렁하게 여기는 기묘하고 알 수 없는 선거는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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