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달러 넘쳐나는 러시아 관가 주변에 '명품 선물'행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연말을 맞은 러시아 관가(官街)가 선물꾸러미를 든 방문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정부 고위 관리나 의원 등 '높으신 분들'에게 올해의 '후원'에 감사를 표하고 내년에도 변함없는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기업인이나 민원인들이다. "기름을 발라야 제대로 움직인다"는 말은 러시아에서 연말연시 최대 유행어가 됐다.

일간 트루트(노동)를 비롯한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관공서와 국가두마(하원) 건물 복도엔 평소의 몇 배에 이르는 인파가 북적대고 있다. 기업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의 손엔 하나같이 크고 작은 선물꾸러미가 들려 있다. 매년 연말이면 벌어지는 풍경이지만, 고유가로 쏟아져 들어온 오일달러 덕에 경제가 유난히 흥청대는 올해에는 선물 수준이 한층 올라갔다는 게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만년필.코냑.캐비아(철갑상어알) 등은 아주 평범한 선물에 속한다. 받는 사람의 기호와 취미를 미리 알아내 사냥광에겐 외제 사냥총을, 낚시 애호가에겐 고급 낚싯대 정도를 선물해야 그래도 성의를 표시한 것으로 통한다. 서재 꾸미기가 취미인 이에겐 수만 달러에 달하는 고서적 전집을 건네기도 한다. 의원 사무실용 집기로 고가의 이탈리아산 원목 가구를 선물하는 경우도 있다.

대당 가격이 수천~수만 달러나 하는 핀란드산 명품 휴대전화 '버투(Vertu)'도 선물용으로 인기다. 하원 윤리위원회 위원장인 겐나디 라이코프 의원마저 최근 언론과의 회견에서 "3000달러짜리 롤렉스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연말 선물 챙기기에 누구보다 신경을 쓰는 건 역시 기업인들이다. 관료주의가 심각한 러시아에서 공무원의 펜대는 기업활동의 성패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많은 회사가 자체 예산에 선물비를 따로 책정하는 것은 물론 선물 구입과 전달을 책임지는 전문 직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진품' 선물을 구하기 위해 유명 골동품 전시회, 경매장 등을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고미술품 수집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자칫 고가를 주고 구입해 전달한 선물이 뒤늦게 가짜로 밝혀져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선물 공세가 과열되면서 선의의 선물과 뇌물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논쟁도 뜨겁다. 공무원에 대한 선물의 한도액을 정한 법률이 통일돼 있지 않아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한 법률이 미화 200달러(약 18만원)를 한도액으로 정하고 있지만 너무 낮아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유철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