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건강보험 확대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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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복지부 공무원들은 단돈 1원이라도 예산을 확보하면 절반의 성공으로 여긴다. 윗사람으로부터 유능한 공무원 소리를 듣는다. 1원이 씨가 돼 몇 년 지나면 수십억, 수백억원으로 늘어난다. 복지란 게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물러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 개혁도 그런 경우이고, 작게는 장애인 차량 LPG 보조금 폐지, 의료급여 합리화 등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복지국가의 원조인 스웨덴이나 독일 등 유럽도 복지 축소의 진통을 겪고 있다.

고령화가 빨라지고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 복지 지출이 늘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제대로만 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지만 발을 헛디디거나 잘못 들여놓으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건강보험이 그런 경우다. 다른 경우보다 좀 더 고약하다. 학습효과가 없는지 '보험적용 범위 확대-축소'라는 전철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일의 뒤처리는 국민 몫이다. 보험료 인상이 그것이다. 물가가 오르고 노인이 늘면서 보험료를 올리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내년 인상률(6.5%)은 국민의 심리적 저항선을 넘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복지부 장관이 고발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01~2003년 신년 벽두에도 그랬다. 95년 이후 건강보험을 확대한 여파가 2000년 의약분업 파동과 맞물려 홍수처럼 할퀴고 지나갔다. 우리 건강보험 역사상 보험료를 한꺼번에 20% 올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얼마나 급했던지 담뱃값을 올려 보험 살리기에 보탰다.

이런 아픔을 딛고 2003년 말에 흑자로 돌아서 1조원이 넘는 돈이 쌓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돈을 마구 풀기 시작했다. 시민단체나 노동계도 보험 확대를 압박했다. 전문가들이 이러면 곧 거덜난다고 경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열린우리당 의장인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있었다. 확대 전담팀을 구성했고, 이 정부의 유행물인 로드맵을 건강보험에도 도입해 환자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겠다고 선전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김 의장의 장관 시절 주요 업적 리스트의 상위에 올라 있다.

그 결정판이 식대의 보험 적용이다. 암 환자에게만 돈을 풀다 보니 다수의 인기를 끌 만한 것을 찾았고 그게 식대였다. 여기에 연 6000억원이 들어간다. "식대가 그리 급하냐"는 비판이 일자 김 장관의 후임자인 유시민 장관은 "난들 하고 싶어서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조선 초기 학자 정도전은 빈민을 위한 복지제도로 의창과 혜민국약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의창의 곡식은 반드시 빈민에게만 대여해야 하고 원본(原本) 회수는 철저해야 이 제도를 항구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혜민국약국도 빈민에게 약을 싸게 공급하되 원본 지출을 절제.절약할 것을 주창했다.('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지식산업사)

우리 국민 중 세금을 내는 사람은 900만 명이 좀 넘지만 건강보험료는 이보다 두 배 많은 사람이 매달 낸다. 세금보다 더 민감하다. 정도전이 강조한 약은 요즘 의미로 의료서비스, 원본은 보험재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건강보험 제도를 항구적으로 운영하려면 재정 안정이 기본이다. 정부가 우선 할 일은 선심성 보험 확대보다는 안정적인 돈 관리다. 내년에 보험료를 그리 올려도 8000억원의 적자가 난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보험 적용 범위를 축소하고 로드맵에서 약속한 건보 확대 일정을 늦추는 응급조치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진료비 지출 방식 개선, 경증 질환 부담 조정 등의 근본적 대안이 나와야 국민이 보험료 인상에 동의할 것이다.

신성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