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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정성진 시대를 논하다] 下. 한국정치 새 살 돋게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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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야가 경쟁적으로 내놓는 정치 개혁안이 얼마나 성공하겠느냐는 다소 자조적인 질문에 정성진 총장은 “지금이 국가적 위기라는 인식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고,박관용 의장은 “현재의 난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때문에 가능하다”고 대답했다.위기든 난국이든 오히려 그 것이 정치 개혁의 기회라면서,두 사람은 이런 현실 진단을 바탕으로 전화위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사회: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2백24억원을, 민주당은 2백74억원을 썼다고 중앙선관위에 보고했는데요.

朴의장:그것이 정직한 보고라고 누가 믿겠습니까(모두 웃음). 정치자금에 관한 한 정치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욕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이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사회:그러면 정직하게 보고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朴의장:일부 국한된 사람 외에 누가 정확히 알겠습니까마는 아마도 상당한 액수겠지요.

사회:최돈웅 의원이 SK 한 기업에서 받은 돈만도 1백억원이니 그 '상당한 액수'에 현기증이 납니다. 정치자금은 왜 항상 문제가 되고 뒤탈이 납니까. 거둔 만큼만 쓰면 될 텐데요.

鄭총장:우리의 정치문화나 사회 풍토와 관련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정치자금이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봅니다. 정권이 바뀌면 특혜든 보복이든 그 결과가 대가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朴의장:그리고 우리 정치의 오랜 관행 아니겠습니까. 돈 안 쓰려는 후보와 돈 쓰게 하려는 '정치꾼'들 사이의 싸움이 정치자금 문제의 핵심입니다. 유권자들은 으레 정치인이 향우회든 동창회든 다른 어디든 돈을 내놓으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고비용 구조가 여기서 생겨난 거죠.

사회:대가성이란 말이 참 희한한데요. 정치인이 뇌물을 받아도 대가성이 없다면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습니까. 대통령도 대가성이냐 보험성이냐에 따라 수사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구분이 가능합니까?

鄭총장:법률적으로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가가 따르면 알선수재 등의 파렴치한 범죄가 되지만, 보험성이라면 단순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가니까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순수한 보험성은 없죠. 결국 이득과 혜택을 바라고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사회:그러면 소위 당선 축하금은 대가성입니까 보험성입니까(모두 웃음).

鄭총장:금액과 수수 방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규모가 작고 의례적 범주라면 동양적 예의 차원의 인사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대부분 대가성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회:어느 측근이 받았다는 11억원 정도면 어떻게 됩니까?

鄭총장:글쎄 그 정도라면 아무래도…. 허허 허허허.

朴의장:보험성이란 말이 아주 편리하게 쓰이는데 솔직히 나는 그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어요. 어느 의원이 개인 후원회를 열어 기업인한테서 순수한 후원금을 받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기업인이 얼마 뒤 국세청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인사시킬 경우 순수 후원금은 대가성으로 바뀝니다. 그런 관계를 악용해 수사기관은 정치자금 후원을 아주 편리하게 써먹습니다. 정치인끼리 모이면 '닭장에 총쏘기'라고 해요. 아무나 불러다가 얼마 받았느냐고 묻고, 기업에 가서 장부 뒤지면 다 드러나니까요. 정치자금 수수가 정치 보복이나 야당 길들이기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그런 것을 고칠 권한을 바로 국회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朴의장:공개 지원이나 국고 보조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개별 후원에는 반드시 문제가 따릅니다. 따라서 관계법을 고쳐야 하는데, 영양 실조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한테 안약만 넣는 식으로 고쳐서는 안됩니다. 법인세 1%를 정치자금으로 내게 하자는 논의도 있으나, 기업들이 자꾸 해외로 빠져나가고 오히려 법인세를 낮춰달라는 마당에 또 하나의 준조세 부과는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회:대통령은 검찰 수사가 경제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데, 경제에 영향을 주지않는 수사가 실제로 가능합니까?

鄭총장:수사의 궁극 목표가 불법 정치자금이지, 기업 활동이 아니라면 검찰의 개입과 절제는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사회:대통령은 정당 장부를 먼저 본 뒤에 기업을 조사하자고 했는데요.

鄭총장:말은 쉽지만 정당 쪽에서 그렇게 쉽게 수사에 협력하겠습니까. 기업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朴의장:검찰은 검찰의 역할이 있는데, 경제에 영향을 주지 말라는 것은 무리하고 불필요한 요구입니다.

사회:그러니까 경제에 지장이 있어도 조사를 하든지, 지장이 있으니 절제를 하든지 그런 판단까지 검찰에 맡기라는 말씀인가요.

鄭총장:그렇습니다.

朴의장:그 판단은 대통령 통치 행위에 속합니다.

사회:재계에서는 수사 결과 못지않게 수사 과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설사 수사를 하더라도 짧게 끝내달라는 말인 듯한데요.

鄭총장:그래야지요. 포토라인에 세워놓고 사진 찍는 것도 전근대적 행태입니다.

사회:고백성사니 대사면이니 하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朴의장: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단계가 아닙니다. 고백성사를 하더라도 의혹이 밝혀진 뒤 할 일입니다. 절차의 우선 순위를 지켜야지요.

鄭총장:일반사면은 기소된 사항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한 경우에도 공소권을 없애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지고 나서 국민이 납득할 경우에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사회:재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鄭총장:대통령 주변을 포함한 소위 386 세대들의 반기업적 정서가 문제입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기업윤리를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이에 기업도 할말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사회적 책임과 윤리에 관한 인식을 높여 기업 자신이 사회의 친기업적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朴의장:보험금을 내는 자세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비용을 감당하는 자세로 기업의 각오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 기회에 제도와 법으로 그 변화의 물꼬를 트겠습니다.

사회:의원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서 개혁이 안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朴의장: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 개혁 과제들의 실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사회:국민이 어떻게 도와야 개혁이 순조롭게 이뤄지겠습니까.

鄭총장:부끄러워서라도 정치인이 손을 못 벌리고, 시대적 개혁 요구에 반대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의 압력이 최선책일 듯합니다.

朴의장:이번에는 정치권 합의보다 국민적 차원의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정당정치가 안정돼야 합니다. 분당.합당.당명 개정 등 변화가 너무 잦은데 이는 과거의 잘못을 그대로 덮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제가 6선인데요, 민한당.신민당.통일민주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 등 단 한번도 같은 당 공천으로 당선된 적이 없어요. 탈당은 딱 한번 했을 뿐입니다. 탈세하고 회사 이름 바꾸고, 탈세하고 사장 갈아치우는 행동과 뭐가 다릅니까.

사회:하도 속아서 그런지 국민은 한번 수술하고 나면 새살이 돋는다는 말을 귓등으로 넘겨버리는데요.

朴의장:이와 같이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전향적 자세를 갖지 못하는 정치인과 정파가 있다면, 내년 선거에서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의 행태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모두 다 떨어집니다.

사회:그 말씀 믿어도 됩니까. 언제는 국민이 용서해서 그런 정치를 했습니까?

朴의장:믿으세요. 무엇보다 국민의 의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피부로(!) 느낍니다. 이왕의 엄청난 실망감에서 국민은 현 상태를 더는 묵과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인들에게 이번 사태는 적당하게 시간만 벌면 원상태로 돌아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빅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치권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예요.

鄭총장:국민의 저력도 있고 시대도 변했기 때문에 기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새살은 분명히 돋아납니다. 나는 낙관적으로 봅니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권과 국민의 의지입니다. 의지가 있다면 못할 게 뭡니까.

사회: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한두 가지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鄭총장:허허. 세상사에 만병 통치약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우선 대통령.국회의원.국민 모두가 '내 탓이오'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朴의장:내년 총선에서 완전히 선진국처럼 달라질 수는 없겠지요. 다만 현재 상황이 국민에게 너무 실망을 주고 폐해가 크니까, 말로 안 되면 법으로라도 규제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패 정치를 척결해야 합니다. 적어도 돈에 관한 한 정치인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국민의 신뢰를 되찾도록 이끄는 노력이 시급합니다. 선거 때 돈 뿌리고, 부당한 방법으로 기업에서 돈 뜯어내던 이제까지의 관행은 법과 제도를 통해 내년 총선까지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차를 마시던 중에 종교 얘기가 나왔다. 정성진 총장은 "나는 유신론자는 분명한데 아무 데도 안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라고 밝힌 박관용 의장은 "의원 중에 가톨릭 신자가 많다"며 "지난 정부 때는 대통령(김대중).야당 총재(이회창)가 다 가톨릭 신자였다"고 했다. 사회자가 "하느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고, 고백성사를 하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정치는 왜 이 모양입니까"라고 뼈있는 농담을 하자 모두 씁쓸한 웃음만 지었다. 잘못을 고백하자는 정치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정치가 모습을 드러낼 때 이 씁쓸함이 가실 텐데….

정리=박승희.이가영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사진설명>
국회의사당 의원동산 벤치에 나란히 앉은 박관용 국회의장(右)과 정성진 총장.마침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장난을 치는 소풍나온 유치원 개구쟁이들의 표정이 천진스럽다.두 대담자는 이날 우리 미래에 희망을 표시했다."새살은 상처에서,기회는 위기에서 나온다."이들이 논한 시대의 정신은 '절망을 주는 정치'에서 '희망을 이끄는 정치'였다.[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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