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풍요·행복기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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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다가오는 3월1일은 우리민족의 유서깊은 명절인 정월대보름이다. 요즘은 농군천하지대본이 「천하지소본」쯤으로 비중마저 낮아진 느낌이지만 농사를 천직으로 삼아온 옛조상들에게는 정 월 대 보름이 야말로직풍요를 상징하며 절중 「으뜸명절」이었다. 소출과는 달을 지모신으로 여겼고, 조수와 농사에 영향이큰 1년농사의 거울로삼았기 때문이다. 회남자의 글에도 중국 사람들은 관장하는 수호신인 망서와 섬아의 이름을 부르며 한해의 품요와 행복을 빌었다고 되어있다.>
「이끼 낀 바위에 구름 감기는/깊은 산속 외딴집/노을속 꽃밭만 날아다니다/하얀 시냇물 따라/칠보 화관 쓰고 시집온 새댁/감나무집 지붕위/…·/수줍어볼붉힌 달님이/천만마리 나비떼데불고/둥실 마실나서면/온 마을/부럽디 부러운 눈길들은 온통/무지개 속살결보다 더 고운/그달무리의 바다에 빠져/·…/출렁거리고 있다.」
경기도 평택 평일국민학교교감전우용씨(50·시인)의 주옥같은 시『달맞이』의 일부다.
정월대보름의 풍년 기원 연극은 매우 다채롭다. 그중 특색있는것은 방금 떠오른 대보름 달빛아래 결쳐지는 달맞이와 달집태우기, 쥐불놓이 등.
달맞이는 정월대보름날 만월을 보고 소원을 빌거나 농사일을 점치는 풍속이다. 한자어로 영월·망월이라고 하는 이 전통레저는대보름날에 달이 솟는 것을 남보다 먼저 보는 것이 좋고 길하다하여 다투어 뒷동산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이날은 마침 쥐불놓이와 횃불싸움을 위해서 홰에다 불을 붙여가지고 언덕에 오르기도 했다.
동녘하늘에서 휘영청 밝은 달이 솟아오르면 사람들은 제각기소원을 빌었다. 농군들은 농사가잘되기를 바랐고 과년한 자녀를가진 부모는 좋은 배필이 나타나 주기를 기원했다.
처녀·총각들은 시집·장가들기를 소원하고 서당에 다니는 학동들은 학업성취를 위해 시루떡을 들고가서 빌기도했다.
대보름달빛을따라 1년농사를 점치기도 했다. 즉 달빛이 붉게 보이면 그해는 가뭄이 들고 빛이희면 장마가 질 징조며, 빛이 밝으면 풍년이고 빛이 흐리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해석했다.
또 달이 남쪽으로 기울면 해변쪽에 풍년이 들고북쪽으로기울면 산촌쪽에 풍년이 들 징조로 여겼다.
중앙대 임동권교수등 민속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풍속은 『열양세시기』와『동국세시기』등의 문헌에도 나타나있으며 달이 뜰 때의형체 ,출렁거림, 높낮이, 달의 윤곽과달무리에 따라 한해농사를 점쳤다고 설명한다.
즉 달무리가 두터우면 풍년이 들 징조고, 얇으면 흉년, 차이가 없으면 평년작이 될 징조라는 것이다.
다음 달집태우기는 긴나무를 베어다 세운뒤 짚단·솔가지·마른풀 등을 높이 쌓아 달집을 짓고 달이 뜰 무렴에 불사르는 풍속.
기록은 없지만 전통레저 달집태우기는 전국에 폭넓게 분포,전해져오고 있다.
달집태우기는 청장년들이 풍물을 치며 각가정의 지신밟기를 해주고나서 짚이나 솔잎을 모아가지고 오면서 시작된다. 청소년들은 나무나 짚을 직접 모아오기도 한다.
이것은 대개 언덕이나들판·산위에 쌓게 되며 오두막이나 커다란 다락모양을 만들기도했다. 그리고 대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태우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조상들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달맞이를 했고 불꽃이 빨갛게 솟아오르면 신나게 농악을 울리면서 불이 사그라질때까지 춤을 추거나 주위를 돌며 환호를 올렸다.
때로는 달집속에 대나무들을 넣어 「투닥」거리는 마디소리를 내 악귀들을 쫓기도 했다. 또 그때까지 날리던 연을 비릇해 잣다른 물건들을 달집과 함께 살라버렸다.
이때 청소년들은 이웃마을 사람들과 횃불싸움을 걸기도했다. 「망울이」나「망울이불」을 외치면서이웃마을의 불길과 견주어 어느 쪽이 더 높이 올라갔나에 따라 쾌재를 부르기도했다.
달집태우기의 불은 풍요의 상징이었고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 바로 그것이었다.
질병도 근심도 없는 밝은 새해를 맞는다는 꿈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달집태우기라는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달집이 탈 때 고루 잘 타오르면 풍년,도중에 꺼지면 흉년이 찾아들 징조라고 수군거렸다.
정월대보름은 10간2지에 따라 새해의 첫 자일, 즉 쥐날이 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정월 첫자일인 노자왈에는 백가지 일을 삼가고 근신한다고 했다. 『지봉류세』에는 쥐가 곡식을 축낸다해 상자왈에는 모든 일손을 놓고 놀았다고 했다.
쥐는 곡식을 축내고 피해를 주는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불을 밝히지 않았고 아낙네들은 길쌈이나 바느질을 삼갔다.<강유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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