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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선 『겨울여자』로 흥행신기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김호선감독(1941년생)은 작년까지 14년 동안 『겨울여자』(77년)의 58만5천명으로 최다관객동원 흥행기록 보유자였다. 그의 기록은 임권택감독의『장군의 아들』(90년)이 세운 67만8천명으로 깨진다. 당초 그의 기록은 이장호감독이 수립했던 『별들의 고향』(74년)의 46만5천명을 경신한 것이었다.
김호선은 이번에 임기3년의 감독위원회 위원장선거에서 이장호와 격돌, 치열한 득표공작전 끝에 71대57, 14표 차로 이겼다.
선거전에는 양 진영(?)이 충무로 근처 호텔방을 얻어 본부를 차리고 지지자들이 드나들며 떠들썩했었다. 아무쪽에도 가담 안한 다른 감독들도 몇사람 모이기만 하면 선거향방에 대해 쑥덕공론이 무성했다.
위원장이 되면 무슨 이권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권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그저 하다보니 그렇게 가열되더라고 김호선은 말한다. 감독위원회의 이전 임기중에는 당초 조문진이 위원장이었는데 직배반대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장호·정지영 등 몇몇 감독이 탈퇴해 감독협회라는 별개의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조문진이 직배반대 투쟁여파로 재판소에 끌려가 8개월 징역·2년 집행유예 선고로 위원장직을 내놓자 선거로 장일호가 그 자리를 맡았으나 평소에 좋지 않던 건강이 악화되어 물러난다. 이때 김호선·임원식이 잔여임기1년5개월을 놓고 선거해 김호선이 2표 차로 이긴다. 이렇게 하여 김호선이 조직활동에 뛰어들게 되는데 그러다보니까 영화계 전체를 생각하게 되고 제도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된다.
감독위원회는 지금까지 영화인협회 산하에 있었는데 회원 90%이상이 독립을 주장해 곧 감독협회로 독립할 예정이다. 촬영감독을 비롯한 배우·시나리오작가들도 모두 독립할 것으로 보여 유명무실하게 테두리만 남게 될 영협은 일종의 연합회 형식으로 기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하던 직배반대투쟁은 한국 영화인의 사활이 걸려있는 것인만큼 영원한 과제로 남는 것이지만 무제한 극한투쟁으로 진행하기 보다 분야별 단체가 협력해 현실적으로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도 하고 투쟁도 계속하는 신축성 있는 자세가 취해지지 않을까 전망된다.
김호선은 백호빈·김수용·유현목 등 밑에서 조감독으로 10년을 보내는데 주로 유현목의 조감독으로 오래 있었다.
국문과 출신이기도 해서 소설을 쓸까 했었지만 연극을하던 삼촌 김세종의 영향으로 영화쪽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삼촌은 북청 태생으로 일제 때부터 연극으로 저항해 감옥에 수도 없이 드나들던 사람인데 6·25때엔 이북5도청의 함경북도 지사자리에 있다가 그만 납북, 피살되었다.
김호선은 『환녀』(74년)로 데뷔한다. 이영일 시나리오였던 이 영화는 당초 유현목에게 의뢰되었던 것이지만 유현목이 자기 체질에 안맞는다고 그만두고 대신 자기의 오랜 조감독이었던 김호선을 추천했다. 요새는 제작량이 많아 상당한 경력을 가진 조감독이라면 비교적 쉽게 독립해 감독으로 데뷔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감독이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김호선은 유현목의 조감독시절 너무도 감독을 하고싶어 어떤 작품의 연출중 유감독이 돌연히 사망하면 그 작품은 자기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하고 몽상까지 한 적이 있었는데 비로소 하나 하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행도중엔 예기치 않은 차질들이 생겨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도 발생했다.
그러자 김호선의 제2작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원작·김승옥 각본·75년)가 발표된다. 이 영화는 신인감독의 작품답지 않게 38만명의 관객이 쇄도, 흥행적으로도 성공할 뿐만 아니라 한 가엾은 창녀의 생태를 그려 당시 한국사회의 치부를 그대로 들추어 보이는 독특한 리얼리즘을 수립한다. 그리고 창녀영화의 하나의 고전이 되며 그후에 쏟아지는 유사한 영화의 효시가 된다. 김호선은 이 영화로 일약 주목받으며 흥행감독으로 크게 떠오른다. 임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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