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민족주의' 외쳤지만 … 차별금지 법안 '표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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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올 2월 미국 수퍼보울 최우수선수(MVP)에 하인스 워드(30)가 뽑혔다. 그가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선 '혼혈인 열풍'이 불었다. 혼혈, 부모의 이혼, 가난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웅'이 된 그의 이야기는 많은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4월 워드가 어머니 김영희(56)씨와 함께 방한하자 우리 사회의 혼혈 열풍은 최고조에 달해 혼혈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뒤흔든 계기가 됐다. '닫힌 민족주의'에서 '열린 민족주의'로 나가자는 여론도 높아졌다. 워드는 한 달 뒤 다시 한국에 와 혼혈인을 돕는 재단 설립을 발표했으며, 이달 초에는 국내 혼혈아 8명을 그의 구단이 있는 미국 피츠버그로 초청해 풋볼 경기를 보여주며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국내 혼혈인들의 상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국내 유일의 혼혈인 지원단체인 펄벅 재단은 "제도나 시각이 확연히 달라지지도, 예상보다 후원이 늘지도 않았다"며 "다만 워드 열풍이 혼혈에 대한 편견 해소의 출발점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혼혈 이슈 선점 경쟁이 치열했다. 워드의 방한에 맞춰 정부와 여당은 대학 입학 할당제 등이 포함된 '국제결혼 가정에 대한 차별 금지법' 제정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한나라당은 혼혈 1세대도 아우르는 '혼혈인 및 혼혈인 가족 지원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5월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이런 움직임이 지지부진해져 연내 처리는 사실상 물건너갔다. 단일민족을 강조해 온 교과서도 개정될 걸로 알려졌지만 교육부 관계자는 "오랜 통념을 하루아침에 교과서에서 삭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일단 내년 개정 초.중.고 교육과정에 혼혈인, 국제결혼 자녀 관련 내용을 추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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