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이택순 청장의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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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올 한 해 중요한 테마인 '평화적 집회.시위문화 정착'은 잡힐 듯, 들어올 듯하면서 항상 아쉽고 실망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이택순 경찰청장이 10일 '15만 경찰관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e-메일이다. 올해 역점사업으로 추진했던 시위문화 개선이 별 성과가 없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 청장은 문제의 e-메일에서 "(성과가 없었던 이유가) 경찰이 강력하게 법을 집행하지 못해서일까"라고 자문한 뒤 "책임을 미루고 싶진 않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대책만으로는 현상의 근본에 접근할 수 없다"고 변명을 했다. 이어 "(일부에서) 미국 경찰처럼 해야 한다고 응원 겸 훈수를 한다. 옳은 말이지만 한국의 현 시점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교과서 같은 말씀이다. 말 안 듣는다고 시위대를 총으로 쏘고 죽도록 패고…. 이 나라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이 청장이 착각하는 점이 있다. 국민은 경찰이 모든 집회.시위를 막고 시위대에 맞서 방패와 진압봉을 휘두르라고 요구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평화.준법시위는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불법.폭력시위에 대해선 공권력을 단호하게 행사해 법질서를 지켜 달라는 것이다. 국내에서 과격시위를 일삼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대가 6월 미국 워싱턴에선 준법시위를 벌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경찰은 공권력의 남용으로 비치지 않도록 인내와 자제를 유지해 왔다"는 이 청장의 인식은 특히 우려되는 대목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공권력의 남용이 아니라 공권력의 실종이다.

이 청장은 아직도 정권의 정통성이 부족하고 경찰은 권력의 하수인이기 때문에 시위대가 애꿎은 전.의경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핵심은 '좋은 게 좋다' 식으로 폭력시위를 적당히 눈감아주는 경찰의 보신(保身)주의다. 지난해 시위 농민 사망 사건 이후 몸 사리기는 경찰의 고질이 됐다. 차라리 시위대에 얻어맞더라도 불상사만 생기지 말아 달라는 정서가 퍼져 있다. 이러니 시위 대처에 원칙이 설 수 없다. 이 청장의 변명이 그럴 듯하게 들려도 내용 면에서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철재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