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동 「떡골목」|대물린 떡맛… "정성으로 빚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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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낙원동 떡골목에선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햄버거·피자·핫도그 따위는 아예 음식취급도 못 받는다.
이곳 사람들은 음식이라면 적어도 맛깔스런 손길로 장시간 정성을 들여야지 5분도 안 걸리고 「후딱」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은 흰팥 갖고 맹그는 「개미떡」도 한약방서 쓰는 「계피」로 맹그는 줄 알고 있재. 그라몬서도 양코백이 음식이라면 사죽을 못쓰니… 원참….』
제일떡집 주인 유천옥씨(60)는 청소년들의 입맛이 날로 서구화돼 장사 안되는 것은 둘째치고 우리 것을 외면한다는 세태를 개탄하며 손때가 묻은 떡메를 쓰다듬었다.
낙원동 낙원상가 옆 떡집거리는 크고 작은 떡집 15곳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 8평 남짓한 가게 한쪽 구석에 기계·절구 등을 갖춰놓고 손님들의 주문에 따라 떡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곳에 떡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부터.
한일합방이 되면서 오갈데 없어진 궁궐의 나인들이 이 근처에 터를 잡아 호구지책으로 떡을 빚은 것이 시초.
이들이 만드는 떡은 당시만 해도 일반 백성들이 구경도 못해본 「궁중떡」이어서 서울 각지에서 떡을 사러 이곳에 몰려 들었다.
『외할머니도 이곳에서 떡을 떼다 팔고 궁인들의 떡 빚는 일을 거들다 솜씨를 익혔죠.』
외할머니-어머니에 이어 3대째 떡을 빚고 있는 낙원떡집 주인 이광순씨(48)의 자전적 증언.
이씨는 이 일대 떡집 대부분이 2대·3대에 걸쳐 떡을 빚고 있어 집집마다 특유의 떡 맛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한다.
때문에 서울 시내 그 많은 떡집들이 사라져도 이곳만은 나름대로의 기반을 다져 「떡골목」으로서의 명성을 간직할 수 있었다는 설명.
낙원떡집의 경우 교동국교 옆 신식건물에 분점을 낸 것을 비롯, 미국 LA에도 교포들을 상대로 하는 분점을 개설, 이씨의 여동생이 운영하고 있다.
이같은 유명세를 타다보니 서울 딴 곳에서 똑같은 상호를 쓰는 떡집들이 자주 생겨나 낙원떡집을 비롯한 몇 집은 정식으로 상호등록까지 했다.
『낙원상가가 생기기 전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할 땐 간판이고 뭐고 있었나. 그러다가 한두집씩 간판을 달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때만해도 안경쓴 사람이 드물었던지 「안경쓴 아줌마」로 통해 아예 「안경쓴」을 이름으로 정했어.』
안경쓴 떡집 윤옥순씨(63)의 말.
설을 앞두다 보니 요즘은 떡국에 쓸 가래떡을 찾는 사람이 많아 일손이 바빠졌지만 가장 바쁜 때는 결혼식철인 봄·가을.
개피떡·인절미·약식 등이 주로 나가는 이때쯤엔 집집마다 오전 4시부터 일어나 하루 한가마씩의 쌀을 떡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한다.
경사의 종류에 따라 쓰이는 떡도 각각 다른데 약혼·결혼식 때는 서로 사이가 좋으라고 색깔이 서로 다른 개피떡 2개를 맞붙인 「쌍개피떡」, 돌잔치 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5색 빛깔의 「무지개떡」이 주로 나간다.
회갑 때는 잔칫상 위에 올려놓는 「굄」이 필수적이며 다식·약과·강정·사탕·은행 등 13가지의 굄을 각각 두자높이까지 쌓아 올리는 것이 격식.
『돌절구에다 떡을 치는 일이 제일 힘들었어. 파고다공원 근처에 나가 인부 하나를 사서 떡을 치라고 하면 하루가 고작이지. 얼마나 힘든지 다들 도망가버려.』
안경쓴 떡집 윤씨는 다행히 5년 전부터 자동으로 떡을 찧는 기계가 나와 집집마다 큰 일 하나 덜었다고 했다.
하지만 떡은 냉강고에 넣을 경우 다른 음식들과는 달리 맛이 없어지고 굳어져 매일매일 팔만큼의 떡을 빚어야 하는 것이 이들에겐 가장 힘든 일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알아주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어. 지금까진 그런데로 버텨왔지만 이러다간 매달 30만∼40만원의 월세도 못 내 쫓겨나는 집이 생길 판이야.』
『입맛만큼 간사한 것은 없다』며 떡시루를 옮기는 윤씨의 안경에 하얀 김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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