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경제관료/최철주 경제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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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보의 돈버는 게임은 종국에 가서 분탕질로 끝났다.
한보는 사업을 일궈나가는 초기부터 이미 돈을 벌게 되어 있었다. 그는 그 까다로운 세법을 꿰뚫었으며 토지 및 주택관계법의 허점을 짚어나가는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돼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정계·관계·언론계 인사들을 앞세워 로비를 벌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반칙플레이도 없는 아주 매끄러운 게임이었다.
한보의 돈버는 게임 내막이 들춰지기전에 우리들은 무역특계자금에 얽힌 국회의원들의 외유와 예·체능계 부정입학에 관한,말하자면 「부패의 구조」라는 가제를 붙여도 좋을 또다른 사회단상을 보았다.
잇단사건에서 아예 침묵을 지키는 그룹이 있다. 관료집단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동네북이 됐다고 체념해 왔다. 정책이 자주 뒤집히고 그로 인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차라리 정책입안의 주류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마저 번져있다. 6공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때로는 부정사건에 관련돼 쇠고랑을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상당수의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예금구좌에 과민한 반응을 나타낸다. 늘 그들의 구좌가 감시받고 있다는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고 있다.
떳떳한 돈으로 그 출처를 들이댈 소명자료를 갖추고서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조바심한다. 누가 부정공무원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 길이 없다.
주요 정책을 다루는 공무원들은 업계나 단체 인사들과의 비공식 모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업계는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반론도 제기하고 하소연도 하고 싶으나 「미운털이 박힐까봐」 말문을 열지 않는다. 관의 경색이 경제계의 속사정을 전달할 통로를 봉쇄했으며 이럴바에야 차라리 신문광고를 통해 정부에 애로사항을 「건의」하는 것이 낫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부의 어느 기관장은 『오해받기 싫어 업계 사람은 아예 대면조차 안한다』고 했다.
그 때문에 실물경제의 감을 잡는데 다소의 어려움은 있지만 오히려 이것저것 신경 안쓰니 마음 편하다고들 한다.
한 전직 고위관리는 특히 경제관료들의 정책 연구 및 입안활동이 너무 소극적이며 그들 자신이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있다고 안타까워 한다.
사실상 한자리수로 억제하기 어려운 물가 고삐를 계속 움켜 쥐어야 하고 한동안 수입을 억제했다가 미국의 압력이 거세자 국무총리·부총리가 잇따라 『시장개방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일깨우기 위한 교육계획을 마련하겠다』고 백기를 들고 만 것은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어떻게 집행되고 있는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중견관리들은 여전히 오랜 침묵을 지킨다. 수입을 억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어떤 시그널이 위에서 전달되면 그게 차후에 어떤 문제를 야기시키든 말든 그대로 집행하고 만다. 뻔히 무리가 있는줄 알면서 주요 농산물 개방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게 마음 편한 일이었다. 그게 본전이라도 찾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무슨 의혹이 일어나면 사건의 재발을 막기위해 관련법규에 새로운 조항을 넣어 또 「규제」를 가하면 될 것이다.
수서특혜분양 같은 일이 없도록 주택·택지관계법의 운용을 더욱 욱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부의 개입을 더욱 강화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는 강력한 법적·행정적 뒷받침을 갖춘 규제수단이 오히려 여건의 변화에 대한 신축성을 잃게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 어렵다고 한다. 이제는 능력있는 경제관료조차 더이상 소신을 펴는데 「모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료들은 침묵한다. 어떤 단체 또는 기업이 민감한 문제를 담고 있는 새로운 투자를 위해 정부에 사업인·허가를 요청해도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 계속 결재를 미룬다. 「뜨거운 감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채 놓아둘 것이 분명하다. 작년과 금년초에 걸쳐 몇가지 프로젝트들이 그렇다.
사정당국은 작년에 돈의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 다분히 의심가는 예금구좌들을 뒤졌다. 그런 「규제」를 피해 상당한 금액이 국내 외국계 은행으로 「도피」 했다. 돈은 안전한 곳으로 흘러간다.
경제에서 「규제」는 앞뒤를 재고,그리고 한 눈을 크게 떠서 멀리 가늠하고 난 다음 취해져야 한다.
정부는 여러차례에 걸쳐 되도록 많은 문제의 해결을 시장기구에 맡기고 자율성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세계의 개방화 추세에 대응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갖가지 의혹이 꼬리를 물고 특정기업의 돈버는 게임에서 반칙이 많았다고 해서 그 때문에 여타 부문에까지 규제가 강화돼서는 곤란하다.
새로운 규제는 또 새로운 부조리를 낳을 온상이 된다는 것을 우리의 성장사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같은 부조리는 국민 대다수에 많은 부담을 안겨 주었다.
실력있는 경제관료들 조차 몸조심,입조심하고 있는 「침묵의 구조」야말로 한국 경제의 위기다. 그들의 바른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좌절에서 벗어나도록 「정치논리」가 숨을 죽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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