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총리 왜 동남아 순방했나|「발등의 불」 식량난 해결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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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최근 동남아 국가들을 잇따라 방문, 활발한 경제외교를 펼쳤다. 그의 이번 순방은 북한의 식량사정과 관련, 쌀 도입문제 등이 매우 중요한 현안으로 등장했으며 북한이 무역확대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뚜렷이 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올 신년사에서 아시아국가들과의 협력을 강조함으로써 동남아 외교강화를 예고했다. 김주석이 아시아국가들의 부상을 평가하고 관계강화의 뜻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의 아시아 외교 중점정책은 소련·동구권의 격변과 한국의 북방정책에 따른 외교손실, 이에따른 대외경제협력의 어려움을 메우려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중국·베트남·라오스 등 전통적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해 온 국가들과의 친선 우호관계에만 그치지 않고 동남아국가연합(ASEAN)·대만·호주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연총리의 동남아 순방을 결산해 본다.
◇동남아 외교강화 배경 = 북한의 동남아 외교가 아시아 비핵평화재대화, 남북한 유엔 단일의석에 의한 가입주장 등 정치성을 띠고 있기는 하나 보다 긴급한 현안은 최근 어려움에 빠진 경제와 관련, 대외경제협력을 확대하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동남아를 순방하던 연총리 일행속에 북한의 경공업분야 최고책임자인 부총리 김복신, 대외경제사업부장 정송남, 무역부와 외교부 부부장 등이 포함된데서도 알 수 있다.
이번 순방에서 북한은 전반적으로 동남아 국가들과의 교역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핵심은 식량문제였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증거는 많다.
작년 11월 연총리가 중국을 공식방문, 경제외교를 펼친것도 이와 관련된다. 양국간에 체결된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5년간에 걸쳐 1억5천만달러를 중국이 북한에 원조하고 이것이 식량구입자금이라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북한측은 1월 중순 싱가포르의 한 상사를 통해 한국으로부터 10만t의 쌀을 국제가격(캘리포니아산 중질미 기준 t당 3백85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t당 1백달러 수준으로 사되 경화대신 명태 등 북한산 1차산품으로 지불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왔다. 통일원측은 북한이 제3국 무역상사를 통해 지난해 12월부터 금년 1월 말까지 네 차례에 걸쳐 총 43만5천t의 남한 쌀 반입의사를 타진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점 등으로 볼 때 식량조달문제가 북한의 동남아 외교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월남은 오랜 우방>
◇동남아 외교 실태 = 그동안 동남아 외교에서 북한이 주력한 것은 베트남과의 협력이었다. 양국간의 경제협력은 84년 이후 두드러지고 있는 가운데 86년에 86∼90년간 통상협정을 체결, 장기 통상협력관계를 구축했다. 89년 6월에는 양국간 경제 및 과학기술협조 위원회 창설에 합의, 조인했다.
90년 1월에는 외교 대표단이 베트남·라오스를 순방하는 등 관계를 계속 발전시켜 오고 있다.
북한이 아시아 사회주의국가 뿐 아니라 동남아국가 연합측과의 외교를 강화하려는 징후는 작년 4월25일부터 5월18일까지 차봉주 외교부 부부장이 이들 국가(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를 순방한데서 표면화됐다. 작년 11월에는 북한의 군사지도자 오진우 인민무력부강이 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번 연형묵 총리의 동남아 순방의 첫 방문지는 태국(1월29일∼2월1일)이었다. 태국은 전통적으로 한국을 강력히 지지해 왔으나 88년 차티차이 추나완 총리가 집권하면서 중립적인 외교노선을 걷고 있다.

<가축사료도 수입>
차티차이 추나완은 75년 5월 북한·태국간에 외교관계 수립 당시 외무장관이었다.
그는 연총리의 태국 방문에 앞서 지난달 27일 『우리는 남북한 모두에 어떠한 차별없이 동일하게 대우할 것』이라며 그 이유로 ▲남북한이 통일을 모색하고 있으므로 북한에 대사관 개설을 허용해도 별 문제가 없고 ▲태국으로서는 수출시장 확대를 바란다는 점을 들었다.
북한·태국 양국은 75년에 외교관계를 맺은 뒤 77년부터 무역을 시작, 78년 9월에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79년부터 방콕에 북한무역대표부를 설치했다.
북한 총리로서는 9년만에 태국을 방문한 연총리는 양국의 무역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하는데 합의함으로써 본격적인 관계발전의 길을 열었다.
연총리는 지난달 30일 태국 총리와의 회담에서 올해 50만t을 시작으로 앞으로 2∼3년 안에 태국으로부터 1백만t의 쌀을 수입할 뜻과 가축사료용 타피오카 50만t을 내년에 수입할 계획을 밝혔다. 이것은 식량난과 축산사료 조달 필요성에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한편 연총리는 태국의 텅스텐광산 합작기업에 대한 투자에 의욕을 보였고 태국의 시멘트 부족사태를 완화하기 위한 30만∼40만t의 시멘트를 올해 태국에 추가 판매할 뜻을 밝혔다.
그밖에도 태국 정부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은 비료와 철강도 수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태국 외무부는 양국 무역액이 지난 5년간 연평균 2천3백65만달러였고 앞으로 5년간 연평균 6천만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로보아 양국 무역량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며, 88년 창립이래 한번도 열지 못했던 양국 무역공동위원회 회의도 곧 재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수다르모노 부통령의 초청에 따른 연형묵 총리의 인도네시아 방문(2월1∼3일)은 82년 2월 이종옥 총리의 방문 이후 정부수반으로서는 9년만의 일.
북한·인도네시아 관계는 57년 5월 무역협정조인으로 시작, 61년 6월 영사교환, 64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등으로 순조롭게 발전되다가 65년 9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 실패로 야기된 정치혼란 끝에 북한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던 수카르노가 67년 3월 실각함으로써 변화를 겪었다. 67년 10월 새로 집권한 수하르토가 한국과 영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인도네시아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 됐다.
그러나 북한은 인도네시아에 대해 계속 관심을 기울여 왔다. 최근 경우를 보더라도 88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의 양형섭 의장이 인도네시아를 방문, 경제교류 확대문제를 중점 논의했다. 북한이 인도네시아측에 농업기술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북한산 농기구·전자제품을 수출할 것을 요청한 것.
이번에 연총리는 수하르토 대통령과 만나 기존의 무역협정을 확대, 새로운 경제협정에 조인했으며 특히 북한은 기계 및 공구생산 합작회사 설립을 희망했다고 한다. 작년의 양국간 무역규모는 총4천4백만달러였는데 앞으로 상당히 늘어날 전망이다.
그밖에도 북한은 인도네시아측에 한반도 통일 및 유엔 가입문제에서 북측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쌀 도입 문제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형묵 총리는 말레이시아 방문 (2월4∼7일)에서도 교역증대에 큰 관심을 보였다.

<대만·홍콩도 노크>
북한은 64년 10월에 말레이시아와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 양국관계 발전에 관심을 보였으나 70년대까지는 말레이시아가 반공정책으로 일관, 외교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73년 6월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 연총리는 서유럽과 북미 지역의 경제블록화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 무역시장을 만들자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의 제안 및 동남아 지역의 평화·중립·비핵지대화에 대한 동남아국가연합의 제안에 지지를 표명했다. 현재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가속화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 1천1백13만달러 규모의 교역을 점차 늘려나갈 계기를 연 것은 분명하다.
북한은 동남아 외교에서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영역과 내용을 다각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즉 북한은 올 1월20일부터 마카오의 합영관광회사를 통해 대만·홍콩·마카오인들의 비자발급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2월4일에는 대만국민당 장세량 의원이 경제계·학계·언론계 인사들과 함께 무역관계개선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동남아에서 북한을 승인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인 필리핀의 외무장관 라울 망글라푸스도 지난 1일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고 확인하기도 했다.
북한의 동남아 외교는 이처럼 전면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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