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길거리 심장마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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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따라하세요. 심장을 열다섯 번 꼭꼭 누르고, 입으로 두 번 호흡을 불어넣으세요."

"못하겠어요. 구급차 왜 안 오는 거야."

월드컵 한국과 토고의 경기가 열렸던 6월 13일. 서울 영등포의 한 맥주집에서 중계방송을 보던 김모(51)씨가 갑자기 쓰러졌다. 술집 주인은 곧바로 119에 전화를 했다. 구급차가 출동하는 사이 구급팀 간호사는 전화로 심폐소생술을 유도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주인은 "못하겠다"며 손을 들었다. 쓰러진 지 4분 만에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하고, 그 후 5분 만에 환자를 병원으로 옮겼다. 환자가 쓰러진 지 9분 만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김씨는 생명을 잃었다. 박재영 서울소방방재본부 지도의사는 "옆에 있던 누군가가 심폐소생술을 했더라면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심장 마비로 갑자기 쓰러진 환자에게 시간은 곧 생명이다. 응급처치를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 그러나 심폐소생술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전기 자극을 줘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심폐소생 기기(제세동기)가 비치된 곳도 별로 없다. 강동성심병원 응급의학과 유지영 교수는 "심장이 멎은 뒤 4~5분이 지나면 뇌손상이 온다"며 "병원으로 빨리 옮기는 것 이상으로 최초 발견자의 응급 처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 구급차만 기다리는 현실=한국응급구조학회에 따르면 심장 이상으로 갑자기 사망한 사람은 한 해 2만5000~3만 명꼴이다. 생존율은 2.5%다. 미국의 생존율은 22~43%다. 최초 발견자가 심폐소생술을 하는 비율이 미국은 50% 이상이고, 한국은 5% 수준이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다. 대한심폐소생협회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민 1007명 중 심폐소생술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3.3%에 불과하다.

제세동기도 턱없이 부족하다. 15개 공항 중 제세동기가 설치된 곳은 인천공항과 김포공항뿐이다. 심지어 1209대의 구급차 중 10%는 제세동기가 없다. 황성오 연세대 응급의학교실 교수는 "심장이 불규칙하게 수축하는 심실세동 환자는 제세동기 사용이 1분 늦어질 때마다 생존율이 7~10%씩 감소한다"고 말했다.

◆ 실습형 교육 절실=미국의 지하철이나 버스에선 '배우라, 찾아라, 사용하라'는 제세동기 홍보문을 쉽게 볼 수 있다. 교육과 응급 장비의 보급, 과감한 사용은 생명을 살리는 지름길이다.

당황하지 않고 응급 처치를 하려면 철저한 실습형 교육이 필수다. 서울시 설문 응답자 중 59%가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은 경험은 있다. 그러나 이 중 75%는 학교나 군대에서 단체로 강의식 교육을 받았다. 실전에서 쓸 만큼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오동진 한림대 의대 교수는 "미국에선 17개 주가 응급처치 과목을 이수해야 고등학교 졸업장을 준다"며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응급처치 교육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재문 제주한라대 응급구조과 교수는 "할인점.스포츠센터.은행 등 공공장소 15만 곳 정도에 제세동기를 설치해 소화기처럼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 제세동기(除細動器)=심장마비가 발생한 초기에 환자의 심장에 전기 충격을 가함으로써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기계장치. 선진국에서는 제세동기가 구급차의 필수장비가 돼 심장마비 환자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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