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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경제가 지배하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1. 오데사 항만 사무소
2. 키예프 시내. 고급 오토바이가 즐비하다.

이코노미스트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회사가 어디냐고요? 폭스트로트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세금 줄이는 재주를 가졌거든요.”

키예프에서 만난 어느 한국인 기업가의 얘기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우크라이나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은 세관을 거치게 돼 있다. 어디서나 그렇듯 제품별로, 아이템별로 세율이 다르다. 고급 제품일수록, 사이즈가 클수록 세율이 높다. 세금 줄이는 재주는 세율을 낮게 적용받는 것을 말한다. 29인치 TV를 들여온다고 했을 때 세율이 낮은 14~17인치급 관세를 물리게 하는 것이다.

가령 100달러짜리 휴대전화를 수입한다고 보자. 세관에서 관세 10%에 부가가치세 20%를 매기면 도매가격이 132달러가 된다. 이렇게 되면 소매점에서는 적어도 400달러에 팔려야 남는 장사다.

그런데 시장에서 이 제품은 300달러에 팔린다. 그래야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 누군가 재주를 부려 세율을 낮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폭스트로트(Forkstrot)가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세율을 고무줄 줄이듯 ‘조정’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얼마나 낮은 세율을 적용받느냐, 이것이 세관 딜러의 첫 번째 경쟁력이다. 우크라이나의 세관 유통은 이 분야 1위 업체인 폭스트로트를 비롯해 아베베(ABB)·비스트포르트(MWM)·엘도라도(Eldorado) 등 ‘빅4 딜러’가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관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거느리고 가전·정보기술 제품 등을 유통하고 있다. 폭스트로트는 전국에 150여 개 자사 매장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계 기업인 엘도라도도 우크라이나 유통점이 50여 개나 있다.

세관 업무 빅4 업체가 움직여

키예프에서 대학을 나오고 기업에 취직하면 대개 250~400달러의 월급을 받는다. 그런데 이 돈을 모두 월급통장에 이체해주는 기업은 아주 드물다. 기껏해야 정부기관이나 금융회사에 다니는 직원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다.

월급통장과 함께 이들은 별도의 ‘월급봉투’를 받는다. 만약 A라는 직장인이 월 400달러를 받기로 하고 B라는 기업에 취직했다면 이 회사 사주와 A는 “월 170달러만 은행에 송금해주고 나머지 230달러는 현금으로 준다”는 이면 계약을 맺는 것이 보통이다.

▶키예프의 고급 쇼핑몰

유수의 대기업은 물론 다국적 기업들도 이런 ‘관행’을 따르고 있다. 이를 통해 사주와 직원은 전체 임금의 37~50%에 이르는 세금을 아낄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현지 기업인의 얘기다.

“정식으로 400달러의 월급을 주면 법인소득세·급여세·사회보험세·실업기금 등 7개 항목에 걸쳐 160달러를 추가로 국가에 납부해야 한다. 이는 직원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세율이 30%, 많을 때는 50%에 이르는데 이를 모두 낸다면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들도 이런 ‘뒷문 거래’에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에 중장비 두 대를 팔고 서류 작업을 하던 D중공업 관계자는 무역 서류를 검토하다가 깜짝 놀랐다. 20만 달러짜리 중장비 두 대를 수출하고 관련 서류를 받았는데 수입상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도착지도 다르게 돼 있었다.

키예프의 무역회사와 거래를 했는데 정작 도착한 곳은 이른바 ‘조세 천국(Tax Haven)’으로 통하는 키프로스였다. 결제 금액도 달라져 있었다. KOTRA 키예프 무역관의 김창식 관장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이런 일이 가끔 발생한다”고 말했다.

세관에서의 뇌물, 편법 통관으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 무역’, 명세서에 없는 월급까지-. 이런 모든 행위가 우크라이나의 지하경제를 만든다.

지하경제는 일단 시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높여준다. 월급 200달러를 받는 봉급쟁이가 첨단기능이 잔뜩 들어간 250달러짜리 휴대전화를 들고다니고, 30달러가 넘는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지하경제 덕분이다. 유력 정치인이 수억 달러를 들여 라이벌을 매수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역시 지하경제 때문이다.

지하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금과 부담금을 피하기 위해서다.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슈나이더와 클링마이어가 발표한 ‘세계 110개국 지하경제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52.2%였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형편이 나아진 것이란다. 1998년만 해도 지하경제 비중이 85% 이상이었다는 것. ‘관시(關係)’ 문화가 심하다는 중국(13.1%)은 물론 같은 동슬라브 문화권인 러시아(48.7%)보다 지하경제 비중이 크다. 30~40%로 추산되는 브라질·우루과이 등과도 비교가 안 된다.

슈나이더와 클링마이어는 “대개 법의식이 낮거나 실질 세 부담률이 높으면 탈세의 유혹이 커지게 돼 있다”고 분석한다. 현지 언론인 ‘델로’ 지의 올렉 아레스트라크노프 부편집국장은 “(우크라이나보다) 지하경제가 더 심한 나라도 있다”고 반박하며 “지하경제 규모가 큰 원인은 단순히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가가 이를 알면서도 적당히 눈감아주고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이 눈을 감아주는 것은 약과다. 직접 ‘공정가격’을 제시하기도 해 물의를 빚기도 한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유력 경제지 ‘비즈니스’가 뇌물 관행에 대해 심층보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즈니스’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실패한 ‘세관 때려잡기’

“우크라이나 기업의 전체 운영비 가운데 20%는 뇌물 비용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국이 부당한 행정처분을 했을 경우 국회의원을 통해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만 달러를 써야 한다. 검찰총장을 만나게 해주는 데에만 10만~50만 달러가 든다. 문제가 해결되고 아니고는 별개다.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령을 발동하도록 로비를 하는 데는 최소 150만 달러를 내야 한다. 사안에 따라 금액은 훨씬 높아질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나 국제기구 사이에서도 시선이 곱지 않다. 외국계 기업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 마케팅’이라는 조어가 유명하다. 사업할 때 뒷돈을 필수적으로 건네야 한다는 의미다.

일부에선 “뇌물도 마케팅의 한 가지 수단”이라는 말도 나온다. 자금세탁방지 관련 국제기구인 FATF(Financial Action Task Force on Money Laundering)는 우크라이나를 필리핀·인도네시아·이집트 등 15여 개 나라와 함께 ‘돈세탁 위험국가’에 포함시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하경제의 덩치를 줄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해 초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세관을 공격했다. 전국 10개 세관 가운데 7곳이나 조사를 받았다.

WTO 가입 위해 세율 낮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관의 복지부동이 심해진 것이다. 세관의 부패를 때려잡겠다고 했는데 정작 정상적인 통관 업무까지 차질이 빚어졌다. 가전제품 하나 들여오는 데 1개월 이상 걸리기도 했다. 소비경제가 멈칫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수출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정치를 움켜쥐고 있는 올리가키들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유셴코의 ‘세관 때려잡기’는 석 달만에 없었던 일이 됐다. 어렵사리 칼을 뽑았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최근엔 형편이 나아졌다. 지난해 관세인하 조치를 단행했고, 세관 수수료도 송장 금액의 1%에서 0.5%로 내렸다. 숙원 사업인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과도한 세율을 낮춰 부패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도 반영됐다.

그러나 외국 기업들의 반응은 아직 미지근하다. 우크라이나 경제분석가인 스콧 브라운은 “일단은 두고 보자(wait and see)”는 것이 현지의 분위기라고 전했다. “쿠치마 집권 시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지하경제 규모를 GDP의 60%에서 40% 수준으로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재무부 산하에 의심스러운 금융활동을 감시하는 전담부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나탈리아 카테리느추크 NTN 채널 편집국장

“한국 개발 모델 벤치마킹하고 싶다”

언론인은 최근의 극심한 정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민영 채널 NTN의 나탈리아 카테리느추크 편집국장을 만난 것은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셴코 대통령은 ‘한 지역의 대통령’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빠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최근 우크라이나의 변화는 불안정한 정치환경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정치환경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우크라이나는 현재 한국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서다. 이곳의 정치환경은 매우 급속히 변해왔다. 어떤 예측도 하기 힘들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갈가리 찢어놓는 데 있다. 차라리 경제환경에 대한 예측을 해 보는 게 더 맞는 거 같다. 경제환경이 곧 정치환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가 우크라이나의 경제가 정치적 불안정성 때문에 좋을 수 없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본다.”

오렌지 혁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렌지 혁명은 시기상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쿠치마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성장을 멈추고, 보수주의적으로 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런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쿠치마 대통령이 3연임을 하려고 했다는 걸 믿고 있었고, 이는 법에 없는 바이며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국민은 새로운 대통령에게 믿음을 주지 않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첫째로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다.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는 통일된 국가가 됐어야 하는데, 현재의 대통령은 ‘한 지역의 대통령’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빠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 40년간 경제발전에만 국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데올로기 쪽으로 바뀌었다. 최근 10년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 변화에 대한 대가로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이 매우 늦어졌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만 신경 써왔다. 중산층·고위층 사람들이 이를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실패해왔다. 아주 천천히 이데올로기 중심 사회에서 시장경제 사회로 바뀌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깊다. 그러나 경제가 무엇이고 그의 중요 메커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다.”

우크라이나는 굉장히 큰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하지만 당신네 국가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쿠치마 전 대통령을 두고 강한 리더십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셴코 대통령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 과연 누가 강한 리더십의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아직 없다. 우리나라엔 지적 자산, 천연자원들이 매우 많다. 그래서 그 방면으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하겠다.”

미사일과 우주항공산업에서 우크라이나는 굉장히 발달한 나라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가전제품으론 냉장고만을 생산하고 있다. 도대체 왜 TV, 휴대전화 같은 물건들을 생산하지 않는가?
“미사일과 우주항공학에 대한 기술은 소련시대 때 전수받고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키워줬던 것이다. 하지만 신기술, TV나 휴대전화 같은 새로운 기술력은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이 기술들의 개발에 투입할 예산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예산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냉장고뿐이다.”

<이코노미스트 8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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