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편지 … 닮은꼴 '글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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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인 4일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전격적으로 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이 편지가 중국 문화혁명 전야에 홍위병을 흥분시켰던 '글 정치'를 연상시켜 화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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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와 평론=노 대통령은 '통합 신당론'을 놓고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등 지도부와 의견 차이를 보였다. 노 대통령은 당 지도부가 추진하는 통합신당을 '지역당'으로 규정했고, 김 의장 등은 이에 반발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지도부를 설득하는 대신 '직격탄 편지'를 당으로 부쳤다. 이 편지는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올렸다.

이 편지는 사실상 평당원들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 편지 사건 후 친노파 당원들은 대규모 당원 대회를 준비했다. 순식간의 변화에 당내 통합신당론 세력은 위축됐다.

문화혁명 직전인 1965년, 중국에서도 한 편의 글이 정치적 폭풍의 도화선이 됐다. 그해 11월 야오원위안(姚文元)이 한 신문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평론을 실었다. 야오는 마오의 추종자 '4인방' 중 한 명이다. 이 평론은 사실상 마오의 인지 아래 쓰인 글이다.

평론은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류사오치(劉少奇) 국가 주석과 덩샤오핑(鄧小平) 등 공산당 당권파(黨權派)를 겨냥했다. 실용주의적 정책을 주도하던 당권파가 마오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권파는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마오는 '평론 정치'로 자신의 직접적 지지기반인 대중을 동원했다. 홍위병의 거센 물결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지도부가 대거 숙청됐다. 이처럼 마오쩌둥과 노 대통령은 어려운 정치적 고비 때 '대중과 당원'을 상대로 정치를 했다.

조선대 중국어과 김하림 교수는 "마오쩌둥이 야오원위안의 글을 통해 당권파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최근 노 대통령, 열린우리당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 "대중 동원하는 포퓰리즘이 비슷"=중국 현대사를 전공한 한 소장 교수는 "당시 마오쩌둥은 공산당을 직접 통제하지 못했다. 당을 통제하는 데 한계를 느껴 중국 인민한테 직접 정치를 하려 했다"며 "당 지도부의 일을 풀지 못해 국민이나 당원을 직접 상대하는 포퓰리즘은 마오쩌둥이나 노 대통령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직격탄 편지'를 보낸 노 대통령은 지지도가 바닥이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 편지에서 밝혔듯이 "대통령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다. 게다가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다.

정도는 다르지만 '글 정치'를 할 당시 마오쩌둥의 상황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란 글이 나왔을 때 마오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노동력을 총동원해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인 '대약진 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하면서 마오는 국가 주석에서 물러나 2선에 머물렀다.

◆ 바깥을 돌며 안을 치다=1965년 당시 마오가 주로 머물렀던 곳은 수도 베이징보다는 후난성 등 지방이었다. 야오원위안의 글이 베이징 정치판을 흔들어 놓을 때에도 마오는 멀리 떨어진 지방에 머물렀다. 외곽을 쳐 중심을 흔드는 원격조종 정치는 마오 정치의 한 특징이다. 마오는 항일(抗日) 전쟁 당시에도 외곽 때리기 전략을 주로 구사했다.

노 대통령의 편지는 미리 쓰여졌으나 그가 해외로 나간 직후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서울의 여권 정치가 편지 때문에 흔들리고 있지만 노 대통령은 7일 현재 뉴질랜드에 있다.

◆ 두 사람의 '독서 정치'=마오는 어려서부터 책, 특히 역사 소설을 탐독했다고 한다. '삼국지'와 '수호지'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험난했던 대장정 때에도 '손자병법'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당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선물 받고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서재엔 '정관정요''자치통감' 같은 왕조시대 제왕의 통치술과 권력투쟁에 대한 책도 많이 꽂혀 있었다. 그는 독서광이었다.

노 대통령 역시 독서를 즐긴다. 심지어 노 대통령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정책이나 인사로 반영하곤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드라이브나 대연정론 제의의 이면에도 노 대통령이 읽은 책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사석에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얘기하고 일독을 권하는가 하면 아예 책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정치 현실에 옮길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 여권 인사들이 모여 대통령의 '독서 정치'를 염려한 적이 있을 정도다. 여권 한 관계자는 "마오쩌둥이나 노 대통령의 정치 중심에 책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고 말했다.

신용호.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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