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자부 장관|중동 전 때마다 애타는「에너지 총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최근 걸프전쟁으로 국체원유가격이 급 등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1,2차 오일쇼크 때와는 사정이 크게 다릅니다. 그때는 기름 한 방울도 안나오는 우리나라의 석유재고가 하루 이틀 분밖에 안됐어요. 한마디로 막막하기만 했지요.』
초대 동력자원부장관을 지낸 장례준씨(삼신 올스테이트 생보 회장)는『지금은 정유회사들이 원유확보능력을 갖고있어 가격만 걱정하면 되지만 담시에는 장판·대사가 뛰어다녀도 기름을사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짧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던 동자부 12년 사의 궤적을 보여주는 장 회장의 회고담이다.
장 회장은 기획원차관·건설·상공부장관등 화려한 경력을 지녔고 부총리 물망에까지 올랐던 인물.
그러나 기름과의 오랜 인연으로 동자부의 산파역을 맡았다.
중동 견유 국들의 자원내셔널리즘으로 시작된 1차 석유위기가 국내에 전해진 것은 74년 초 우리나라의 최대 원유공급 선이었던 걸프사가 20%의 원유공급감량을 통보해오면서부터였다.
당시 막 상공부장관으로 부임했던 그는 부랴부랴 기름을 구하러 사우디아라비아로 그 해 봄 첫나들이를 떠나야 했다.
그 자신은 물론, 당시 각료로서도 초행이었던 중동 항에서 우여곡절 끝에 하루 5만 배럴의 공급약속을 받아내 가까스로 국내원유부족사태를 틀어막을 수 있었다.

<상공부에서 분리>
이것이 우리나라가 메이저(국제석유자본)를 통하지 않고 직접 원유를 도입하는 첫 사례가 되고 1차 석유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의 중동 항은 세 차례가 더 계속된다.
에너지자원, 특히 원유수급을 관장하는 독립 부서로 그가 동자부를 만드는 장본인이 된 데는 그의 이 같은 경험들이 바탕이 된 듯 싶다.
『힘에 부쳤지요.1백 억달러수출도 달성하랴, 중화학공업 개편도 하랴, 기름·전력도 신경 쓰랴. 더구나 그때는 발전소의80%이상이 석유발전소라 이러다간 큰 차질이 나겠다 걱정이 들더군요』
장 회장은 76년 무렵부터 당시총리실산하 행정개혁위원회 및 각 부처와 접촉, 상공부에서 전력 국 등 에너지 관련 부서를 동자부로 분리, 신설하는 방안을 구체화했고 대통령재가를 얻어 78년 초 동자부설립을 보게됐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동자부장관자리.
그러나 장 장관과 기름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설립배경이 말해주듯「기름장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동자부 장관자리에 그가 처음 앉게된 것.
당시 1백억 달러 수출목표달성으로 부총리세도 있었던 그로서는「물먹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었지만 기름안정공급문제가 국가적으로 막중했던 때였던 만큼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런데 79년 벽두 다시 석유위기가 닥쳐왔다.

<중동에 각료들 급파>
이란의 회교혁명으로 시작된2차 석유위기는 선진국들의 사재기와 일부 산유국들의 감산이 상승작용, 돈주고도 기름을 못사는 급박한 물량부족사태로 파급됐고 걸프가 국내공급원유를 21% 감량한 것을 시작으로 칼텍스 등이 잇따라 감량통보를 하기에 이른 것.
1차 석유위기를 겪은 뒤였지만 국내 원유공급은 여전히 이들 메이저 손에 쥐어져있었고 비축계획도 세워졌으나 준비된 것 없이 정유사 운영재고2∼3일분이 고작인 상황이었다. 석유배급제까지 고려해야 할 형편이었다.
2월에 남덕우 당시 대통령경제특보를 단장으로 사우디 등에 정부 원유 확보 교섭 단이 파견되는 등 이번에는 장 장관뿐 아니라 각료들이 모두 나서 동분서주하는 사태가 빚어졌다.『원유를 구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주변의 당부가 압력이 됐다는 당시 한 파견 일부 관계자의 얘기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던 국내 기름 난이 그런 대로 진정된 것은 사우디에 이어 이란·쿠웨이트 등에서 땜질 식 물량확보계약이 이뤄진 그 해 말께.
그러나 겨우 한숨을 돌릴 무렵 12·12사태가 터지고 장 회장은 사우디대사로 발령, 역시 기름외교를 맡게됐다.

<유양수씨 최단명>
2대 동자부장관이 된 양윤세씨(현 한라그룹고문)는 주미공사·수출입은행장을 거친 인물.
차관경제의 한 주역으로 교섭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정평이 있었다.
당시 기정 사실화된 걸프의 국내철수로 원유도입문제가 계속불안을 안고있던 상황에서 양 장관은 부임 초부터 한달 걸러 중동 등 산유국을 들락거리다 5·17사태를 맞아 5개월 단명으로 물러나고 만다.
이어 육사7기로 5·16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원을 지내고 주 사우디대사 및 교통부장관을 역임했던 유양수 장관(현 동아건설부회장)이 들어섰다.
5공 태동기에 발탁된 유 장관인사는 신군 부의 군 원로 예우 케이스였다는 게 주변의 지배적 관측이었다.
군 출신답지 않은 단아한 성품으로 비교적 좋은 평을 얻었던 유 장관은 그러나 이 무렵 신군 부의 이해와 얽혀있던 유공민영화문제에 부딪쳐 역대 동자부장관으로는 최단명인 3개월만에 다시 갈리게된다.
초기 장관들의 이 같은 진퇴는 동자부장관자리의 성격과 한계를 시사하고 있다.
첫째는 원유의 안정공급이 최대 소임이라는 것.
세계10대 에너지수입 국으로, 특히 전체 에너지 가운데 석유의존도가 50%를 넘는 우리실정에서는 당연한 책무일수 있다.
초기장관들은 이 점에서 석유위기라는 위급한 상황을 맞아 거의 원유조달에만 전력투구하다 끝이 난 셈이다.
그러나 메이저가 아닌 국내정유사들에 의한 자주조달능력이 갖춰지고 국제석유시황도 안정된 이후에는 정유사들과의 관계유지가 중요한 일이 됐다.
심하게는 정유사들 눈밖에 나면 장관이 오래 못 간다는 인식이 동자부관리들 사이에 싹틀 정도였다.
둘째는 정치권과의 관계.
각료자리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자리이기는 하지만 특히 업무의 양과 질이 다른 경제부처보다 단순하고 전문성이 덜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동자부장관자리는 정치적 외풍을 더 타게 돼있다.
이 점은 개각 때마다 하마 평에 오르내리는 이들이「감」이 될만한 인물보다는 정치권력층의「안배」차원에서 점쳐지고 있는 것이나 동자부 설립이후 지난12년 사이 10명의 장관이 바뀐 잦은 경질의 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항상 정치적 부담을 안게돼 있는 유가인상문제나 산하기관들과의 원만한 관계는 역대 장관들이 몹시 신경 써온 부분.
특히 산하 기관장들과의 관계는 동자부장관자리의 또 다른 한계로 미묘하게 얘기돼 왔다.

<정치권입김 거세>
사실 경제부처 중 동자부처럼「별자리」많은 곳이 드물다 할 정도. 석공의 안필준 사장(4성 출신), 광진공의 최세창 사장(4성), 에너지관리공단의 최상화 이사장(4성)등이 주요 기관을 맡고있으며 5공 시절에는 박정기(전 한전사장)·이규광·김복동(전 광진공사장), 이원조· 최성택(전 유개공 사장)등 권력측근의 거물들이 포진했었다.
결국 동자부장관자리는 그 권한이나 운신의 폭에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빚어진 웃지 못할 일화들도 많다.
예컨대 국제유가가 하락하던 무렵 결정됐던 전기료 인하방침을 당시 한전의 박정기 사장이 청와대에 한번 다녀온 후 백지화시켰는가하면 동자부장관의 사전승인을 받게돼 있는 석유사업기금을 유개공 최성택 사장이 청와대에 보고했다며 인도네시아 마두라 유전에 덜컥 증액 투자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정책을 세우고 산하기관을 감독하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실무처리로 산하기관에 끌려가는 식이 됐던 이 같은 일들은 동자부 위상문제와 관련,6지존에 정부 내에서 제기된 동자부폐지론과 함께 산하공무원들의 구조적인 불만요소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도 비교적 오래 자리를 지킨 장관이 4대 박봉환씨와 7대 최동규씨,8대 최창낙씨, 그리고 현재 상공부장관인 9대 이봉서씨 등이다.
탁월한 경제이론가로도 꼽혔던 박봉환 장관(현 대한손해보험협회회장)은 서슬 퍼렇던 5정조에 1년4개월을 재임하면서 일도 많이 하고 욕도 많이 먹은 인물. 탈 석유정책을 본격화하고 동자부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부임 초 먼저 한 일은 유공인수자를 선경으로 결정, 유공민영화문제를 마무리했으며 정유사들의 원성을 샀던 원유도입 손실보전 금의 지급지연을 처리한 점.
그러나 그는 유공인수과정에서 특혜 세에 휘말리기도 했다.
당시 경제각료 중「센 장관」으로 지목됐던 박 장관은 마두라 유전개발, LNG(액화천연가스)도입 등 이른바 인도네시아프로젝트를 구체화하고 석유비축재원을 대폭 늘리는 등 벌인 일도 많았으나 81년 겨울 검찰과 파워게임 양상으로 치달았던 저질탄사건의 뒤끝에 자리를 뜨게된다.

<에너지절약 꽃피워>
아웅산 사건으로 전임 장관(서상철씨)이 순직하면서 뒤를 이은 최동규 장관은 뚝심과 밀어붙이기 식 추진력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된다.
80년부터 3년여에 걸쳐 동자부차관을 지내 부내 사정을 잘 알던 장관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재임기간 중 특히 에너지 절약시책에 힘써 꽃을 피웠던 인물로 부각돼있다.
산업체의 에너지원 단위관리가 실시되고 대통령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에너지절약 촉진대회가 매년 열렸던 게 이 무렵이다.
최창낙 장관(전경련부회장)은 원리 원칙적이라는 성품 그대로 일에 철저했던 만큼 부하직원들이 매우 어려워했다.
연탄수요감소에 대비, 석탄산업합리화방안이 이 무렴 처음 제시됐다.
그가 부임했던 86년을 전후해서는 국제유가하락으로 엄청나게 쌓인 석유사업기금을 재원으로 석유비축이 확대됐다.
그는 한때 한전 수술의 칼을 빼들었다가 외압으로 이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이봉서 장관은 동자부설립 때부터 들어와 석유위기당시의 산유국교섭 등 실 무역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의 장관재임기간에는 동자부폐지론이 나오는가하면 송유관건설 주도권을 둘러싸고 사무관이 산하기관장의 뺨을 때린 사건 등으로 곤욕을 치러야했다.
현직 이희일 장관은 때를 잘 만나 빛을 보고있는 케이스.
그는 공화계에 대한 안배로 동자부장관직에 들어섰는데 부임하자마자 에너지소비절약시책을 퍼다 중동사태를 만나 폐지론의 그늘에서 기가 죽어있던 동자부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그는 보스기질로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는 데다 동자부의 숙원사업인 기구확장을 꾀하고있어 직원들의 사기가 높은 편.
결국 동자부장관은 원유공급이 안정되면서 오히려 위상이 약화되는 역설적인 운명을 지녔던 자리인 셈인데 최근의 에너지위기를 감안할 때 동자부장관 자리가「거쳐가는 자리」가아닌 뿌리내리는 자리가 돼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