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 귀화제의 뿌리친 하명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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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배우감독 하명중(1947년 생)은 그의 형 하길종 감독(1941년생)과 함께 한국 영화계가 배출한 형제감독이라는 시야에서 볼 때 더욱 흥미로운 존재가 된다.
최인활 원작·각본『명태와 영자』(79년)가 스카라극장에서 한창 상영중 관객반응에 남달리 민감하던 하길종은 잡지 편집자 인명 관과 함께 극장주변 맥주 집에서 한잔 하다가 잔을 놓고 탁자에 엎드려 그대로 사그라지듯 타계한다. 하명중은 지금 생각할 때형의 사인은 일종의 뇌졸중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미국에 유학하여『대부』의 .프랜시스 포드코폴라와는 동창으로 교분이 있던 하길종의 돌연한 죽음은 그가 본바닥 미국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가장 촉망받는 감독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어처구니 없었다. 연기에만 전념하던 하명중은 그로부터 4년 후 처녀 연출한『X』(83년)를 들고 감독 데뷔한다. 감독으로 서형의 뒤를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하명중은 당초 KBS탤런트 5기생(65년)으로 출발했다. 친구인 성우 김세환이 성우 모집 원서를 접수시키는데 따라갔다가 탤런트 모집하는 것을 보고『야, 너도 해봐라』해서 했다. 동기생으로는 백일섭·문오장·이정길·문희·남정임 등이 있다. 제작부의 청소를 비롯한 소도구등 잔심부름으로 1년 반쯤을 지낸다. 데뷔는 엑스트라로 화면에 뒤통수를 보이며 걸어 나가는 것 이였다.
당시 정소영 감독이 TV연출을 하고 있었다.VTR(비디오테이프 녹화장치)가 들어오기 조금 전이었다. 연습은 카메라 없이 하다가 찍으면 모두 나가는 것이었다. 드라마의 타이틀 백에서 엑스트라로 화면을 향해 들어오는 역할이었는데,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던 정소영 연출자가 어찌된 일인지 황급히 돌아나가라고 소리질러서 황급히 돌아나가니까 뒤통수만 보일 수밖에.
후에 배우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하명중이 정소영 감독에게『기억 못하시겠지 만…·』하고 그때 얘기를 했더니『기억하고 있네』하고 말했다. 즉 들어오는 엑스트라의 얼굴을 보니까 이것이 엑스트라의 용모가 아니라 주연급 용모여서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시청자가 혼돈을 느낄까 두려워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는 것이었다. 정소영 감독은 한 배우의 등장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얘기가 될까.
대사훈련이 없다고 느낀 하명중은 실험극단(실험극장이 아니다)에 나가 단역 같은 것을 얻어 하며 대사훈련에 몰두했다. 연극대본 전체를 좔좔 욀 정도로 했다. 그 해 장마철엔 붕괴사고가 많이 났었는데 어떤 레퍼터리의 주역이 그만 압사하는 돌발사고가 났다. 공연 날짜가 촉박한 극단에서는 유일하게 대사를 좔좔 외고 있는 하명중을 대타로 기용한다.
그의 주역무대를 본 TV연출자가『쓸만한 친구 구만····』하고 그를 중용하기 시작, 마침내 인기사극『연화궁』에서 주역인 동궁 역을 맡기에 이른다. 동궁이 사색당쟁으로 유배되는 양반의 딸을 사랑하여 함께 따라나서는 얘기였다. 하도 인기가 높아 연출자 고성원이 TBC로 스카우트되기도 한다.
이 무렵 동남아일대에 극장 3백65개를 체인으로 가지고 있던 홍콩의 쇼 브러더스 영화사 간부가『방랑의 결투』라는 무술영화를 팔려고 왔는데 TV연속극『연학궁』을 보고 하명중에게 계약하자고 해서 했다. 정창화 감독이 가기 조금 전이었다. 쇼 브러더스는 중국영화 70년 사상 한국배우가 중국영화에서 주연하기란 처음이라고 떠들면서 하명종을 하명중으로 개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해서 개명했다. 1967년이었다.『12금전 표』라는 무술영화에서 주연했다.
다시 이 무렵 일본 동보영화사가 홍콩과 합작하려고 빈번히 왕래하고있었는데 하명중을 보고계약하자고해서 가계약했다.
일단 와세다대학을 다니며 일어도 배우고 일본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러던 중 그 당시로서는 거금인 일화 2백50만 엔으로 아예 일본에 귀화하여 본격적인 일본배우가 되라는 제의를 받는다. 국가·민족·가문 등 문제를 놓고 곰곰이 생각한 하명중은 거절하고 귀국한다. 이때가 1969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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