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정치와 돈: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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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물선택·자금조달 골머리/지방,신정보다 설날… 1억원까지 들기도/지역구 성의표시 안할 수 없는 「고문의 계절」
정치인에게 있어서 명절은 「고문의 계절」이다.
지구당 당원들과 활동장·통책·반책 등 자신을 위해 뛰어준 사람들에게 하다 못해 양말 한 켤레라도 돌려야 하고 신세진 사람들에게도 체면치레를 생략할 수 없다.
선거때가 가까운 명절에는 지역구 주민들에게 「성의」표시가 없을 수 없고 구청·군청·동사무소·경찰서·소방서의 하위직 공무원들에게는 그들의 노고를 알고 있다는 표시를 해야한다.
이곳 저곳 챙기다보면 선물을 해야할 곳은 엄청나게 늘어나게 마련이고 상대적으로 선물의 값과 질은 떨어지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받는 쪽의 반응이 시큰둥해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생긴다.
2천원짜리 비누세트를 돌릴 경우 5천명이면 1천만원,1만명이면 2천만원이 소요된다.
따라서 설날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의원들의 고민도 커질 수 밖에 없다.
연말연시에 선물을 돌린 의원들은 이미 홍역을 치른뒤라 한결 느긋하지만 나머지 의원들은 요즘 설날선물의 품목선정과 자금조달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투약시기를 설날로 잡은데는 3월의 지자제선거와 1년안팎으로 다가온 14대총선을 고려한 정치적 계산때문이다.
특히 지역구가 지방인 경우에는 신정보다 구정이 명절분위기가 뚜렷하다는 점도 고려됐다.
민자당의 경우 평의원들은 자금조달 능력에 따라 연말 또는 설날 경비로 적게는 1천만원,많게는 1억원까지 투입하고 있다.
줄잡아 50억∼1백억원의 돈이 연말연시와 설날에 풀리는 셈이다.
3당통합으로 졸지에 야당에서 여당으로 탈바꿈한 민주·공화계의원들은 『여당이 되다보니 후원회구성도 용이하고 야당때보다 자금사정도 다소 나아진게 사실』이라면서도 『그 대신 야당때는 인기와 「바람」으로 정치생활을 해왔으나 합당으로 여당조직을 흡수하게 되면서 챙겨야할 식구가 두세배씩 늘어나 쪼들리기는 마찬가지』라고 엄살이다.
추석선물로는 계절이 계절인지라 마늘·참기름·미역·고추·어리굴젓등 지역특산품이 인기지만 연말연시나 설날에는 차례를 지내는데 필요한 제기나 김·찬합·교자상 등과 달력등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달력선물은 너무나 구태의연한 것이라 받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없어 비슷한 가격에 오래 기억되는 물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장경우 민자당사무부총장은 뉴스위크지에서 제작한 소형가죽수첩에 지역구내 공무원과 당원·유권자들의 이름을 새겨 돌렸더니 아주 반응이 좋더라고 자랑이다.
외무부의 특허처럼 인식돼온 수첩선물에서 힌트를 받은 장의원은 관내 유권자등 1만명의 명단과 주소록을 작성,국내업체에 의뢰해 금박으로 이름을 새기도록 했는데 선물을 받는 측에서는 『국회의원이 우리 이름까지 기억해주니 정말 고맙다』며 흐뭇해 하더라는 것. 수첩1권당 1천2백원,이름을 새기는데 6백원으로 모두 1천8백만원이 소요됐다.
지역구 초선의 L의원은 지역구의 부활동장 이상 당직자들과 우편배달원·면서기 등 하급공무원,새마을지도자 등 5천5백명에게 냉장고용 그릇6개들이 선물세트를 공장에 직접 주문,18일까지 배포를 끝냈다. 동료 다른 L의원의 추석선물을 본떠 같은 공장에 주문했는데 액면가 5천원 짜리를 2천5백원으로 깎았다.
L의원은 연말과 연초 지역구에 머물면서 50여개 투표구별로 귀향보고까지 끝냈는데 선물비와 귀향보고비를 합쳐 2천4백만원을 투입했다.
지자제선거를 앞두고 이를 이용,비용을 예년보다 줄이는 실속파도 등장했다.
초선의 K의원은 연말에는 연하장만 보내고 설날선물로는 비누·반상기등을 배포하고 있는데 시·도의회 선거에 나설 부위원장들과 경비를 분담하는 대신 「일동」명의로 보내는 편법을 쓰고 있다.
사전선거운동에 저촉되지도 않으면서 주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K의원 자신은 경비를 줄일 수 있으니 『누이좋고 매부좋은 셈』이라는 주장이다.
공화계의 C의원은 화장품·넥타이·쟁반 등 3천∼5천원짜리 선물 3종류를 대상에 따라 전달하고 있는데 『지난해에는 신정과 구정사이에 합당되는 바람에 어수선한 틈을 타 선물을 생략했는데 올해는 구정직전에 임시국회가 끝나니 선물비는 선물비대로 나가고 귀향보고는 따로 해야하는 2중부담을 안게됐다』고 푸념했다.
김영삼 대표와 박태준 최고위원은 연말에 여야의원과 사무처직원들에게 멸치액젓을 이미 선물했고 김윤환 총무도 김장용마늘을 돌렸다.
김덕룡 의원과 평민당 김태식 의원등은 연말에 은행과 기업체로부터 협조를 받아 달력에 본인들의 스탬프를 찍어 발송하는 경제적인 수법을 사용.
평민당의원들은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 정국으로 바뀐뒤 처음맞는 명절인데다 지난 정기국회에서 짧은 국정감사기간 때문에 「인사」오는 경우도 현저히 줄어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한숨이다.
그러나 중진 K의원은 설날에 지역구의 소년·소녀가장과 전경·의경·구두닦이 등 5백명에게 장갑·양말과 20㎏들이 쌀등을 전달할 예정.
선거철에 선물을 돌리면 선거법위반이 되지만 선거철을 앞둔 명절선물은 예의요,인사치레로 아무도 트집잡지 않는 풍토를 정치인들은 한껏 활용하고 있다.<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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