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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중앙 문예」 희곡 당선작|잃어버린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나오는 사람들>
노인
K
청년
의사
수련의
간호원
때 : 현대
곳 : 대학병원의 내과병동 병실

<무대>
내과 병동의 병실 안이다. 왼쪽에 출입구가 있고 무대 정면 벽쪽으로는 가로로 기다란 창이 나 있다. 무척 답답한 인상을 준다. 창에 쇠창살이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층 별실임을 알 수 있다. 창 바로 밑에는 세개의 침대가 객석을 향해 기다랗게 놓여있다. 양쪽 벽에는 소전등이 달려있다.
막이 오르면 왼쪽 벽면의 침대에는 한 청년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 성경책을 보고 있다. 가운데 침대에는 건장한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소형 텔리비전의 야구중계를 보고 있다. 텔리비전은 침대 끝 부분에 객석을 등지고 놓여 있어 소리만 들릴 뿐이다. 맨 오른쪽 침대에는 한 노인이 머리가 깎인 채 누워있다. 간혹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것 외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 조명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청년 (성경책을 덮으며) 우리가 오늘 식사를 다했나요?
K (여전히 텔리비전을 보며) 저녁이 남았잖나.
청년 (창살 너머로 이리저리 살피며) 그럼 세시쯤 됐겠군요. (잠시) 아니, 저녁까지 먹었잖아요.
K 자네, 병원에 너무 오래 입원해 있는 거 아냐. 오히려 병 하나 더 얻은 것 같군.
청년 아저씨야말로 큰일이시군요. 아침부터 나온 국 이름만 한번 대볼까요? 미역국, 콩나물국, 조개국….
K 콩나물국은 어제 저녁이었어. 하긴 이 지경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텔리비전을 끄며) 7개월째라고 했나?
청년 생각하면 답답해요.
K 신경외과로 들어왔다고 했지?
청년 교통사고였어요. 약간의 신경마비 증상이어서 처음엔 외래로 다니며 약만 타먹었어요. 근데 간염이라니… 약물중독에 의한 것 같아요.
K 병원측에서는 뭐래?
청년 뭐라기는요, 내과로 옮겨놓고 이렇게 반년이 넘게 방치하는 거지요. 간염도 C형이라니 의사들도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K 그래도 용케 버티고 있군.
청년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책도 미비하고….
K 그래도 병명이라도 있으니 나은 편이군.
청년 답답하긴 마찬가지예요. 모두 주님의 뜻이려니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가혹한 시험 같아요.
K (재미있다는 듯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지만 신은 20세기 초 이미 니체에 의해 사형 당한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청년 사상이나 철학은 단지 인간들이 영혼의 갈급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일뿐이죠. 그 속에서 참만족을 얻을 수는 없어요.
K 인생에 있어서의 참만족이라… 어려운 말이군.
청년 참된 양식, 참된 음료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거예요.
K 저 노인을 보게.
청년 (갑작스런 지시에 어리둥절해 하며) 무슨….
K 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네. 특히 저렇게 시체처럼 누워있는 인간들을 보면 신은 아예 있지도 않은 가상이든지 아니면 지독한 도박꾼이라는 생각이 들지.
청년 악을 물리치고 주의 영광을 접하실 때가 있으실 거예요.
K 먼저 저 미칠 것 같은 신음소리부터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게나. 저 기력없는 노인의 말로치곤 너무 가엾잖나. 창자를 뒤엎은 무서운 세포 덩어리들이 아니라도 충분히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릴 연세가 아니냔 말일세. (이때 출입구로 의사의 뒤를 따라 수련의와 간호원 들어온다. 정기적인 회진 시간이다. 수련의는 차트를 들고 있다. 먼저 노인에게로 다가간다. 청년과 K 대화하다 멈추고 자세를 바로하며 인사하지만 이들은 거의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다)
의사 (조금 상체를 구부려) 할아버지, 기분이 어떠세요? (노인 뭐라고 답하지만 거의 들리지 않는다) 네,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수련의를 향해) 인터페론 놨나?
수련의 놓긴 놨습니다만 거의 가망이… 부작용도 심하구요.
의사 연세가 있으니까. (다시 노인을 향해) 별다르게 아프신 데는 없으셨습니까? (노인 먼저 보다 큰소리지만 역시 웅얼거림만으로 들릴 뿐이다)
의사 진통제 한번 더 놔 드리도록.
간호원 네. (의사 K쪽으로 다가간다. 수련의 간호원 뒤를 따른다. K와의 대화는 시종 장난기 어린 말투다)
의사 (웃으며) 어젯밤 숙직 잘 섰어요?
K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말도 마세요. 형벌도 무슨 형벌이 그런지 졸려서 죽을 뻔했어요.
의사 마지막 카드였어요. 주로 피곤이 겹쳤을 때 그런 증상이 온다고 했잖아요.
K 그렇긴 하지만….
의사 덕분에 비슷하게나마 증상이 나타났으니 검사결과를 기다려 보죠.
K 비교도 안될만큼 약했었요.
의사 주로 어떤 장소에서죠?
K 한번은 지하철, 엘리베이터, 사내식당… 다양한 편이예요.
의사 대체로 사람들이 많은 장소였군. 소형 컴퓨터 제작회사라고 했죠. 어떤 파트에서 일했죠?
K 해외 영업부였어요.
의사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해요?
K 아직 그럴 단계는 못돼요. 투자비도 엄청나고… 주로 소프트웨어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요.
의사 직접적인 돈 거래가 많았겠군.
K 그게 어디 제 돈인가요.
의사 월급외에 들어오는 돈이 있었을텐데. 한번 솔직히 얘기해 봅시다.
K (다소 높은 억양으로) 무슨 소리예요, 오히려 갖다바칠 입장이었다구요.
의사 증권투자는?
K 조금 투자는 했지만 별다른 재미는 없었어요.
의사 금전문제는 아니란 말씀이죠?
K 그 부분은 깨끗해요.
의사 그럼 결혼생활은?
K (잠시) 별다른 이상은 없어요. 문제가 있다면 그건 다른 가정에서도 흔히 있는 일들이구요.
의사 구체적으로.
K 주로 아내의 투정이죠. 술 마시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 앞집이 가죽소파로 바꿨는데 우리도 바꿔야겠다, 언제까지나 이런 생활에 만족할거냐 과감한 투자를 해보자, 누구는 어디에 땅을 샀는데 무려 열 배가 넘게 뛰었다더라, 마지막으로 하나 있는 아들녀석이 공부는 안하고 비디오 게임기에 너무 열중하고 있다는 거죠.
의사 (은밀한 어조로) 부인과의 잠자리는?
K 그거야말로 아무 이상 없어요.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예요. (잠시) 그런 증상이 오고부터는 횟수가 좀 줄기는 했지만….
의사 돈 문제도 아니고, 심각한 가정사도 아니고… 본인은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요?
K 그걸 알면 여기까지 왔겠어요? 각 진료과마다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의사 (웃으며) 병원 쇼핑을 하셨군.
K 웃을 일이 아녜요. 한번 그런 발작이 오면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 같아요.
의사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면서 구토가 나고.
K 숨이 막혀요.
의사 진땀이나 떨림도 오고.
K 온몸이 화끈거리면서 죽거나 미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의사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멀쩡해지고.
K 사람 미치는 것 아닙니까!
(의사 침대 위의 책 한권을 발견하고 손에 든다. 여태까지의 장난기 어린 태도는 사라진다)
의사 공포의 병동!
K (계면쩍어하며) 그냥 심심해서….
의사 나도 읽었어요. 의사가 환자들을 하나씩 죽여가는 내용이지 아마.
K 보통의 추리소설이예요.
의사 (정색을 하며) 약간 끔찍하죠.
K 가상의 세계니까 가능한 거지요.
의사 미스터리씨의 정신건강상 당분간 압수예요.
K 미스터리?
의사 병명이 밝혀질 때까지만.
K 미스터 미스터리….
의사 병원을 믿어요?
K 믿도록 해보죠. (조심스럽게) 그런데 그 책 돌려주시면 안돼요?
의사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전체적인 상황을 보아서 증세에 대한 심증은 있는데….
K 확증이 문제죠.
의사 퇴원시기는 내일 생각해 봅시다.
(의사 책을 들고 청년에게 다가가려 한다)
K 참, 어제 검사한 건 어떻게 됐죠?
의사 무슨?
K 뼈 밀도 검사….
의사 뼈 밀도?
수련의 망막검사와 함께 시켰습니다.
의사 그런 건 뭐하러 해, 뼈 밀도가 어떻다는 거야! (수련의 난감한 표정 짓고 K는 의아해한다. 의사 K에게로 향하면 수련의 간호원 뒤따른다. 의례적인 자세다) 별일 없죠?
청년 (웃으며) 그렇죠 뭐.
의사 시간이 많아. 성경책은 많이 읽을 수 있었겠군.
청년 주님의 뜻이죠.
의사 그래도 잘 버티는 편이야.
청년 견디기 힘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절대 고통은 고귀함과 통하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선의 존재가 악에 의해 부각되듯이….
의사 재미있는 논리로군.
청년 논리가 아니라 진리죠.
의사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병원에서는 금지야.
청년 네?
의사 (웃으며) 자네의 하나님 말야. 열애중인 것 같군.
청년 (알아들었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아, 네.
의사 아무튼 의지할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잠시) 별다른 이상은 없지?
청년 정체불명의 균이 제 간에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 외엔… 아무런 통증도 없어요.
의사 햇빛은 싫다고 하지 않았나.
청년 어지러워서요. 어느새 이 병실의 조명에 익숙해졌나봐요. (의사, 수련의, 간호원 함께 나간다. K 좁은 창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본다)
K 벌써 어두워졌군.
청년 또 하루가 이렇게 저물었군요.
K 저 밑에 사람들 좀 보라구. 어딜 저렇게 분주하게 오가는 걸까?
청년 (K의 말에 밖을 보다가) 어! 저기 좀 봐요. 우리 병실 간호원이잖아요.
K 뭐가 새삼스럽다구.
청년 웃고 있잖아요. 아휴 앙큼한 것. 환자들 앞에서는 그렇게 무뚝뚝하게 굴더니… 옆의 의사가 누구죠? 난 저 여자는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K 무리는 아니지. 오래 있어봐서 알지않나. 병자로 꽉 찬 병동을 오가며 뭐가 좋아 웃음이 나오겠어.
청년 그것뿐이 아녜요. 한번은 식사 후에 먹는 내 알약을 바꿔치기 해서 가져왔더라구요. 항상 미색 알약 두 알에 빨강, 초록이었는데 초록 대신 흰색 <9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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