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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외길 50년… "「금」 주먹 제조기"|링의 대부 송영수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한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밀 이삭은 패지 않는 법.
66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북경대회까지 한국 아마복싱의 아시안게임 7연패 뒤에는 향토에서 묵묵히 유망주들을 발굴, 조련 시켜온 복싱대부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전남 이재인씨, 전북 조석인씨, 인천 김영배씨 (이상 아마복싱연 부회장), 부산 손영찬 감독(동아대), 충북 전재완 교수(서원대) 등 모두 각 시·도를 대표하는 복싱대부들이다.
68년 멕시코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지용주를 길러낸 올해 63세의 송영수씨(강원도 복싱연맹 부회장)도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해방 전 서울 배재중 1년을 자퇴, 복싱도장을 찾았으니 복싱과 맺은 인연이 50년에 가깝다.
『선수로는 원주에서 벌어진 지방대회 등에 몇 번 참가한 것이 고작이지요.』
휴전 직후 원주주둔 미군 726수송부대에 근무하던 송씨는 선수생활을 입상 한번 못한 초라한 무명으로 마감했다.
하지만 복싱에 대한 애착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연 챔피언감으로 54년 원주 최초의 복싱체육관을 세우고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몇 채의 가건물을 전전한 끝에 원주군청 뒤 창고건물을 빌려 말뚝을 박고 새끼를 꼬아 링을 설치했다.
가진 것이라곤 「마음」 하나밖에 없던 그는 이후 부인 박연희씨(53)가 시집올 때 가져온 「나이가라」 치맛감을 팔아 항시 배가 고프기만한 선수들의 허기를 달래주는가 하면 때론 전국대회에 출전하면서 교통비조차 마련 못해 본의 아니게 철도 무임승차의 명수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어렵게 출전한 대회에서 그나마 참패라도 하게되면 원주시민들 볼 낯이 없어 야음을 틈타 돌아오곤 했지요.』
피를 말리는 마음고생으로 40세도 되기 전에 머리카락이 전부 하얗게 세었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백발은 현재 중절모자와 함께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하지만 이처럼 원주복싱을 키워온 그의 정성 탓으로 각 도의 복싱연맹이 모두 도청소재지에 위치해 있는데 반해 강원도만큼은 춘천이 아닌 원주에 자리잡고 있다.
「사부」 「대부」 「펀치 송」 「골드메달 송」 등 복싱과 관련해 붙은 그의 별명은 부지기수.
「사부」는 원주의 제자들이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부르는 애칭이고 「대부」는 복싱계를 아는 사람 대부분이, 그리고 「편치 송」은 그의 KO펀치를 알아주던 미군들이 붙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아끼는 별명은 「골드메달 송」이다.
70년부터 83년까지 13년동안 최장수 국가대표감독을 지내며 각종 국제대회에서 52개의 금메달을 획득, 외국인 코치들이 그에게 지어준 것이다.
오랜 감독생활만큼이나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바로 대회 보름전 육영수여사가 문세광에게 피격당한 직후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선수단에 『북한에 지면 돌아오지도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로 남북이 첨예한 대결구조에 놓여 있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폐막 하루 전까지 금메달 2개차로 북한에 뒤지다 복싱에서 대거 5개의 금메달을 움켜쥐어 (북한은 2개) 1개차로 앞서는 극적인 막판 뒤집기를 연출했다.
장기영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복싱매니저 송영수 만세 만세』의 축전을 보냈다는 사실이 당시의 강성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보다 앞선 70년 방콕대회 때는 유난히 후텁지근한 날씨로 밤마다 모기가 들끓어 선수들이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다급해진 그는 호텔 종업원을 불러놓고 『스몰 제트기 왱왱 칙칙 플리즈』란 유창한 「콩글리시」를 구사, 모기약을 구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런 송씨의 올 겨울을 맞는 심정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비록 심판자격이지만 나이를 잊고 더불어 한 「사각의 링」에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공산이 커진 까닭이다.
지난해 12월 AIBA(국제아마복싱연맹) 총회는 편파판정을 막기위해 올해부터 컴퓨터 채점기 사용을 의무화했고 컴퓨터 조작이 노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심판의 정년을 60세로 못박았다.
『60세 정년이 무슨 말입니까. 소주 한잔을 마셔도 젊은 사람보다 낫고 아직 안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입니다.』
지금도 소주 2병 정도를 간단하게 비우는 주량에 중절모자·빨간 넥타이를 즐겨 착용하는 그다.
화제가 복싱에서 벗어나서는 단 두마디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그가 복싱을 떠나 내세우고 이야기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못 배운 게 서러워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남몰래 대학(72년 원주대학 졸업)을 다닐 정도로 집념이 대단하기도 했다.
60, 70년대 시절 어려운 가사를 팽개진 채 복싱만을 위해 이리뛰고 저리 달리며 지칠줄 몰라하던 힘은 이제 사라졌으나 복싱인으로 후배를 양성, 세계제패의 초석이 되겠다는 의지와 집념만큼은 아직도 뜨겁기만하다.
송영수씨는 정년없는 복싱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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