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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 받은 경찰관이 무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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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해 개봉한 '두뇌유희 프로젝트, 퍼즐'이란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 한마디. "가죽 점퍼를 입은 놈보다 양복을 입은 놈이 더 무서운 게 세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넥타이를 매고, 한낱 헝겊조각에 불과한 넥타이만 매면 어디든지 통과할 수 있다는 대사가 이어진다. 영화에서 몰락한 사채업자, 부패한 전직 형사, 성매매꾼, 폭력배 등은 범행을 모의하며 "큰 도둑질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자조 섞인 말을 내뱉으며 정장차림을 한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단죄해야 한다"는 이용훈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주장이 호응을 받는 것도 영화의 대사에 공감하는 일반 국민의 정서에서 비롯된다. 소위 '가진 자'들의 범죄는 우리 사회의 건전한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법원이 한 경찰 간부와 열린우리당 당직자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을 보면서 머리가 복잡해진다. 법원과 검찰의 갈등을 촉발시킨 론스타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과는 상황이 조금 다른 것 같기 때문이다.

오락실 운영업자에게서 1억원 상당의 벤츠 승용차와 친인척 명의의 차명계좌를 통해 월 500만원씩 모두 1억여원을 받은 혐의가 있던 경찰서 형사과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법원은 "일부 금전 및 이익의 교부사실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기각사유를 밝혔다. 우리 사회에선 징벌적 의미를 갖는 구속수사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원은 나아가 "유.무죄의 판단이 모호한 부분도 있다"고도 했다. 검찰은 "무죄를 선고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들릴 수 있다"고 불평했다. 이 때문에 "단속권한을 가진 경찰간부가 오락실 업자와 돈거래를 하고, 업자에게 투자금을 돌려달라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합의를 종용한 것이 어떻게 구속사유가 되지 않느냐"는 검찰의 불만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경찰간부는 오락실 업자에게 1억원을 투자해 3000만원을 돌려받고 7000만원에 대한 이익금조로 지금까지 1억원을 받았으며, 벤츠 승용차는 이후에 돌려줬다고 주장했다.

경품용 상품권 사업 참여를 요구하며 관련 업체에서 1억여원을 뜯은 여당 당직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열린우리당의 법률구조위원회와 청년상공인 특별위원회 소속의 두 당직자는 전과 20범의 '외부인사'와 함께 상품권 업체 측에 "전국 총판권을 주지 않으면 허리를 접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들은 또 총리실에 진정을 내는 방법으로 업체 측을 압박해 "상품권 장당 4원씩 이익을 지급한다"는 약정서를 강제로 작성했다. 이들이 챙긴 금액은 5개월간 1억2300만원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법원은 "비례의 원칙에 의해 기각한다"고 다소 생소한 논리로 영장 기각 사유를 설명했다.

문제는 "법원의 영장 기각 사유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데 있다.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다는 판사의 헌법적 독립성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백화점이나 학교 등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 절도범들은 합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영장이 발부되는 경우가 잦다. 법조비리 사건에 연루됐던 김영광 전 검사는 모든 혐의사실을 자백했지만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된 뒤 징역 1년의 실형까지 선고받은 상태다. 물론 지금까지 검찰의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수사태도가 잇따른 영장 기각을 초래한 '업보'라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조관행 전 고법부장판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 이후 법원의 태도가 더욱 엄격해진 것 같아 뒷맛이 개운치 않다. 검찰은 물론 국민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분명하고 명백한 잣대가 필요한 것 같다.

박재현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