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시대에 불을 댕기다…'대역관' 김지남 장편 역사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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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역관 김지남' (하치경, 바른북스)

소설 '대역관 김지남' (하치경, 바른북스)

대역관 김지남
하치경 지음
바른북스

정조 20년(1796년), 우의정이 임금께 아뢴다.

“숙종 무인년에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북경을 왕래할 때에 입수한 『자초신방(煮硝新方)』을 무고(武庫)로 하여금 간행하도록 건의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0년 5월 12일 병진 2번째 기사)

무고(武庫)는 조선시대 중앙정부 산하의 병기창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방위사업청이라고나 할까. 『자초신방』은 화약 제조에 관한 책이다. 조선왕조실록 해당 기사에서 우의정은 이 책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자초신방』은 전날의 방법보다 공력이 매우 적게 들면서도 화약의 생산은 몇 배나 많고 화약의 품질도 폭발력의 강도가 높았으며, 지하에 두고서 10년 동안 장마를 겪더라도 절대로 습기가 끼어 못쓰게 되는 문제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의정은 정조의 ‘행정 신도시’ ‘국방 요충지’로 그해 1796년 축성한 화성(華城)의 군사방위와 관련하여 ‘역관’ 김지남의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다.

역관 김지남이 청나라에서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자초신방』을 입수해 직접 행한 연구개발을 바탕으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이라는 한글 책(한글 연구사에도 중요한 저작이다)을 낸 것이 1692년이다. 정조 때 우의정의 재평가(1796년)보다 무려 100년이 앞섰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그만큼 100년의 지체가 안타깝지만, 역사의 그 시점에선 역관 김지남이란 인물의 탁월한 선각(先覺)을 높이볼 수밖에 없다.

실록에도 여러 번 나오는 실존인물 김지남(1654~1718)의 활약상을 재구성한 역사소설 『대역관 김지남』(하치경 지음, 바른북스)이 최근 출간됐다. 명문 역관 가문 ‘우봉 김씨’ 집안의 김지남은 숙종 연간에 활약한 인물이다.

김지남은 한어 전문 역관이었으나 1682년 조선통신사로 왜국 에도(도쿄)에도 다녀왔다. 이어 10년 뒤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다녀오면서 앞서 말한 ‘금서’를 입수해 새로운 염초(화약 원료) 제조법을 터득했다. 그 공로로 숙종이 큰 벼슬을 제수하자, 소위 ‘양반’들은 “역관(譯官)은 사적(仕籍)에 올리지 않는다”며 반대했을 만큼 중앙정가에서 ‘문제적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김지남은 1712년 청나라와 교섭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17~18세기 조선, 왜와 청을 오가며 활약한 이는 ‘사적(仕籍)’이라는 벼슬아치 명부, 즉 양반 사대부들 ‘그들만의 리그’에 낄 수 없다며 배척당한 중인 출신의 역관이었다.

작가 하치경은 사료에 충실하면서도 기록의 공백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메워가며 이 매력적인 17~18세기 조선의 사내를 되살려냈다.

3권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에서 1부는 조선통신사 이야기다. 작가는 역사의 빈 공백(아마도 중인 신분이기 때문에 기록에서 더 누락됐을 역관의 역사적 역할)에  ‘팀 김지남’이라고 할 만한 수하 ‘무극패’를 등장시켜 오히려 현실감을 더한다. 당시 조선 민중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이들을 조연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들의 감초 같은 역할이 3부까지 이어진다. 대하드라마나 역사극 영화라면 캐스팅할 조연 배우를 고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다. 2부는 앞서 설명한 청나라 군사기밀 『자초신방』을 얻는 과정을 다루며, 3부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국과의 첨예한 외교적 갈등과 물밑 공작을 흥미진진하게 다룬다.

중인 신분으로 나라에 큰 역할을 한 인물, 그야말로 조선 후기 역사에 ‘화약’을 댕긴 인물, 대역관 김지남을 다룬 이 소설은 정치적 격변과 당파의 극한 대립(‘환국 정치’)이 벌어진 숙종 연간이 배경인 만큼 묘하게 지금 한국 사회를 떠올리는 대목이 많다. 그래서 임금이든 서인이든 남인이든, 대통령이든 여야든, 누가 뭐라든 자기 맡은 바 직책에서 최선을 다하는 어떤 잊혀진 영웅의 초상을 그린 소설이라고도 하겠다.

조선통신사와 연행사의 길을 따라 걷는 이 소설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남으로는 에도(도쿄)까지, 북으로는 연경(베이징)까지 수백명의 외교사절이 몇달 동안 이동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영화로 옮긴다면 스펙타클한 로드 무비라고나 할까. 긴 여정의 와중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활약상은 추리소설적인 재미도 더한다.

작가 하치경은 직장과 창작을 이어오며 다수의 단편 소설과 수필을 발표해 왔다. 감사원 부이사관으로 명예퇴직한 뒤 현재는 학교법인 동아학숙 이사와 D해운 상임감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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