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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적 사고’가 힘든 당신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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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성지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찾아 읽다가 생경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활발한…’까지는 끄덕여지는데, 그 뒤에 붙은 ‘낙천적인 어린이’란 문구가 그랬다. 내가 낙천적이었던가. 시험을 못 봐서, 베프가 요즘 나보다 다른 애랑 더 친해져서, 엄마한테 혼나서 자주 상심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낙천은 언제까지 칭찬이었더라. 중학교 성적표부턴 그런 한가한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신 ‘책임감’, ‘성실함’ 같은 단어가 칭찬을 대체했다. 처절한 시험 경쟁 속 EBS만 풀고 “잘 될 거야” 하는 대책 없는 낙천주의는 용납할 수 없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30대 솔로인 날 두고 선배들은 “결혼은 언제 하느냐”고, 전세대출 이자납부 알림은 “집은 언제 사느냐”고 묻는다. 매일이 걱정과 불안의 연속이다. 절대평가인 성격보다 상대평가인 성적이 생기부를 덮으면서, 낙천성은 쓸모 없어진 유치(乳齒)처럼 인생에서 빠져버렸다.

아이돌 그룹 ‘아이브(IVE)’ 멤버 장원영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뜻하는 밈(meme) ‘원영적 사고’가 최근 온라인상 화제다. [뉴스1]

아이돌 그룹 ‘아이브(IVE)’ 멤버 장원영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뜻하는 밈(meme) ‘원영적 사고’가 최근 온라인상 화제다. [뉴스1]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컴백과 함께 열풍인 ‘원영적 사고’는 그렇게 잃어버린 낙천성에 대한 어른들의 향수 같다. 아이브 멤버 장원영의 초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뜻하는 ‘밈’인데, 요약하면 이렇다. ‘부정적 사고=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 긍정적 사고=물이 반이나 남았네? / 원영적 사고=연습 끝나고 물을 먹으려고 했는데 글쎄 물이 딱 반 정도 남은거양! 다 먹기엔 너무 많고 덜 먹기엔 너무 적고 딱 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럭키비키잖앙(네 잎 클로버)’

원영적 사고의 핵심은 나를 기준으로 두고, 닥친 일이 긍정적 결과로 귀결될 거란 확신에 있다. 사실 장원영은 또래 중 악플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가수다. 만 14살 데뷔 이래 별 걸로 다 욕을 먹었다. 딸기를 두 손으로 먹어서, 무대에서 표정이 과해서…. 그런 그가 스무 살에 “타격감 있는 말을 들어도 그게 사실이 아니면 나랑 상관없는 말이 된다. 만약 그게 맞고 진짜 고쳐야 할 점이면 고치면 된다”며 의연해지기 위해 수많은 불안과 걱정의 밤들이 지나갔을 터다. 현재를 직시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내는 원영적 사고는 단순한 천진함이 아니라 송곳 같은 남들의 기준 속 나를 지키는 어른의 주문일지도 모른다.

나이 듦은 포기하는 과정이라지만 그럴수록 잊었던 낙천성을 되살려보길 추천한다. 오기와 분노로 하루를 굴려 가는 직장인에게 그게 가능하냐고? 그럼 세상과 ‘맞다이’를 불사하는 ‘희진적 사고’라도 추천한다. 하이브와 전쟁 중인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사고방식인데, 독기만 덜고 보면 주눅 들지 않고 내 선택을 믿는 긍정이 바탕인 점은 원영적 사고와 같다.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죽긴 왜 죽어 악착같이 살아야지!” 뭐가 됐든 마음 다치지 않고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으시길. 럭키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