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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숙, 18년만의 오페라 "꿈을 거래하는 천재의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내년 새로운 오페라를 내놓는 작곡가 진은숙.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내년 새로운 오페라를 내놓는 작곡가 진은숙.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작곡가 진은숙이 희한한 오페라를 쓰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음악계에 파다했다. ‘양자역학에 대한 오페라다’ ‘물리학자가 주인공이다’ ‘꿈에 대한 것이다’ 정도의 짐작이었다. 또 작곡가가 모든 음악뿐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만들고 노래의 대본까지 쓰고 있다고 했다. 2007년 첫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18년만의 오페라다.

“내 인생에 대한, 또 나에 대한 질문의 오페라다. 해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답이 투영된 작품이다.” 지난달 중앙일보와 만난 진은숙(63)은 새로운 오페라의 내용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통영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인 그는 올해 열흘에 걸친 음악제를 위해 한국에 들렀다.

오페라의 제목은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Dark Side of the Moon)’. 150분짜리 2막 오페라다. “지구에서는 달의 한 면만 보게 돼 있다고 해요. 그런데 달의 뒷면은 표면이나 지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남에게 보이지 않는 자신의 완전히 다른 모습, 그게 달의 어두운 부분이죠.”

이런 제목이 붙은 이야기는 한 물리학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실존 인물인 볼프강 파울리(1900~1958)다. 양자역학을 체계화한 물리학자로, 194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진은숙은 파울리가 심리학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과 가졌던 관계에서 오페라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파울리는 융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융은 그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던 사이다. 진은숙은 천재 물리학자가 남에게 보이지 않았던 모순적인 성격, 욕망을 발견했다.

이제부터가 진은숙의 상상이다. 오페라에서 융은 파울리에게 ‘최고의 학자가 되고 행복까지 얻도록 도와주겠다’면서 ‘너의 꿈을 넘기라’고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파울리는 자신의 꿈과, 그 꿈에 나왔던 세 명의 인물까지 모두 넘겨준다. 파울리와 융은 오페라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나오며 바리톤이 배역을 맡는다. 꿈속 세 인물 중 하나인 여성도 중요한 배역이다.

“모든 것을 가져간 융은 결국 무엇도 돌려주지 않아요. 대신 파울리의 꿈은 점점 줄어들고 더는 꿈을 꿀 수 없게 되면서 학자로서 약속했던 이론도 발표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파울리는 궁지에 몰려 다시 융을 찾아가고 또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다. 이어지는 마지막이 오페라의 핵심이다. “파울리는 융을 죽이려 하지만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는 말만 듣게 되죠. 결국 둘은 하나의 자아였던 거예요.” 진은숙의 새 오페라는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고, 자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상대방이 나의 반쪽이면서 서로 연관된, 일종의 양자역학이기도 해요.”

중요한 키워드는 역시 ‘꿈’이다. 세기의 물리학자를 만들어낸 동력이 그가 꾼 꿈이었고, 그 꿈이 없어지면서 영광과 영감을 잃게 된다. 진은숙은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꿈속의 선명한 환상을 그려냈던 작곡가다. “꿈과 판타지는 내 인생을 견디게 하고 여기까지 끌어온 포괄적 힘이에요.”

지난해 통영국제음악제 무대에서의 작곡가 진은숙(가운데).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지난해 통영국제음악제 무대에서의 작곡가 진은숙(가운데).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진은숙이 말하는 ‘꿈’은 추상적인 희망이 아니라, 정말로 잠을 자며 꾸는 꿈이다. 그는 자신의 꿈이 늘 생생하고 강렬했다고 했다. “잘 때 꾸는 꿈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신비했어요.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적은 범위인데, 꿈속에서는 빛의 모든 걸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게 정말 강렬했죠.” 그는 “이번 오페라의 주인공에서 어느 정도 나의 모습을 본다”고 했다.

오페라 스토리를 만들고 대본까지 쓰는 작곡가는 흔치 않다. “2017년 앨리스의 후속편 오페라를 계획하다 무산됐죠. 그 후로 이상하게 앨리스에게 관심이 없어졌어요. 그러면서 파울리를 발견해 책도 많이 읽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어요.” 진은숙은 독일어로 단편소설 정도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자료 조사와 시놉시스를 만든 시간을 빼면 단 3개월이 걸렸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썼다.

물리학에 대한 직접적 이야기는 없다. “물리학자를 소재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도 쉬운 오페라는 아니다. “청중에게는 힘들 수 있어요. 어두운 작품에, 대사가 길고 얘기도 많죠. 한 번 보고 이해하기는 더 힘들 거고요. 청중은 단순한 이야기에 상상력을 가미하는 오페라에 익숙할 텐데 이건 그렇지 않거든요.” 진은숙은 “특히 한국어로 정확히 번역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진은숙은 온 힘을 다해 작품을 쓰는 작곡가다. 이번 작품에 대해서도 “이게 끝나고도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끝나면 공황장애가 올 것 같다”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아침에 눈 떠서 새벽까지 이 오페라만 쓰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마라톤 주자가 ‘러너스 하이’를 느끼듯 쓴다.  “이건 정말로 내가 해야 하는 오페라였어요. 엄청나게 몰입해 있어서 그 힘든 게 견뎌지죠.” 진은숙은 지난달 “전체의 3분의 1 정도 완성했고, 올해 말까지는 다 마칠 생각”이라고 했다. 오페라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은 내년 5월 18일부터 독일 함부르크 오페라에서 켄트 나가노의 지휘로 4회 초연될 예정이다.

◇진은숙=2004년 그라베마이어상, 2005년 쇤베르크 음악상, 2017년 시벨리우스 음악상, 2021년 레오니소닝 음악상을 수상한 작곡가. 베를린필이 2023년 ‘진은숙 에디션’ 음반 세트를 발매했다. 올 1월에는 권위 있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상을 동양 음악가 최초로 수상했다. 2022년부터 통영국제음악제의 예술 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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