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적대는 사이...美·EU·日은 법으로 자국 기업 지원 [표류하는 AI 헌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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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내에서 ‘인공지능(AI)기본법’ 통과가 미뤄지는 사이 세계 각국은 규제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각 국가별 규제가 AI의 무분별한 활용을 막기도 하지만, 자국에 유리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로이터=연합뉴스

로이터=연합뉴스

규제부터 시작한 EU

지난 3월 유럽의회는 ‘EU AI 법(AI Act)’을 통과시켰다. 미‧중이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AI 산업에서 빅테크를 견제하고 역내 기업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깔려있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 중국 알리바바 같은 빅테크 AI 기업이 유럽에는 없다. 이 법 113개 조항 중 7개는 혁신 기업 지원 조치에 관한 내용이고 나머지는 규제 및 감시와 관련돼 있다.

EU AI법의 가장 큰 특징은 유럽 내 쓰이는 AI 시스템 위험도를 4단계(허용 불가능한 위험, 고위험, 제한적 위험, 최소 위험)로 분류하고, 이에 따른 의무 사항을 각각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소 위험으로 분류되면 별도 규제가 없다. 반면 빅테크들이 만든 거대언어모델(LLM)과 같은 ‘범용 AI 모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EU AI법 53조는 범용 AI 모델 제공자에게 AI 모델 학습에 사용한 데이터에 대한 상세 내용을 공개하도록 했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는 “국내에서도 위험성에 따라 AI 기술에 차등 접근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다만 어떤 AI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은 정확히 분류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지원 근거부터 마련한 미국

미국은 2020년 일찌감치 ‘국가 AI 이니셔티브’ 법을 제정하고 AI 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2022년에만 AI 분야에 17억달러(약 2조3100억원)를 투입했다. 진흥에 초점을 두던 미국은 지난해 생성 AI 열풍 이후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재빨리 규제안도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바이든 행정부는 AI를 규제하는 첫 행정명령을 내렸다. 안전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AI 모델 개발사는 정부가 검증한 전문가 팀의 안전 평가를 받아 결과를 정부에 고지해야 한다. 특히 미국 기업의 AI 기술을 이용하는 외국인(기업)도 적용대상에 포함해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동안 AI 개발을 기업 자율에 맡겨왔던 일본도 이달 열리는 ‘AI 전략회의’에서 법적 규제를 제안할 계획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방침 전환에 대해 일본 정부 내에 신중론도 있다”면서도 “그럼에도 법 규제를 논의하는 것은 일본만 규제 강화에서 뒤떨어지면 사회적 리스크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은 주도권 경쟁

반면 국내 기업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사업 예측가능성에 도움이 될 ‘AI기본법’ 도입은 국회에서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는데 한쪽에선 부처 간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법률’(AI기본법) 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3월 업무계획 브리핑에서 연말까지 ‘AI 서비스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가칭)’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개인정보위원회도 지난 2월 업무계획을 통해 올해 내에 AI 원칙과 기준을 구체화한 ‘6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업계 “국가 AI 산업 컨트롤타워 필요”

정부 부처별로 규제를 내놓자 업계에선 “AI 기본법을 토대로 국가 전체의 AI 전략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관된 AI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종합적인 조율을 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 하정우 네이버 퓨처AI센터장은 “각 부처 이해에 따라 법을 만드니 전쟁터와 같은 생성 AI 시장에서 매일 싸우고 있는 기업들 혼란이 가중된다”며 “국가 전체 AI 전략을 세우고 부처 간 조율을 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다.